나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징용되어 일본 오사카에서 어머니와 이모를 낳고 사셨단다.
그리고 어머니가 10살 되던 해에 외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독립운동을 도왔던 사실들이 드러나 일본 경찰에게 쫓김을 받아 급히 한국으로 혼자 밀항하시고 그 뒤에 외할머니가 두 딸을 데리고 밀항하셨단다. 다행히 곧 전쟁이 끝이 났고 대한민국이 독립을 하였기에 한국에 잘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셨단다.
외할머니는 딸만 둘이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아들을 정말 원하셔서 집을 나가 다른 분을 만나서 아들을 낳고 그분과 같이 사셨다. 죽을 만큼 위험한 일본에서는 열심히 사랑하고 잘 사셨는데, 드디어 안전한 고국에 와서는 아들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되어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것이 가족일까?
여하튼 외할아버지는 다른 여자분을 만나서 아들 둘과 딸하나를 낳으셨단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어서 버림받은 상황이 되었다.
가끔 들르시는 외할아버지를 잘 대해 주셨기에 나는 어린 시절에는 왜 두 분이 떨어져 사시는지 잘 몰랐다.
그 시절 대한민국의 아들 없는 여성들은 그 서러움과 아픔을
어떻게 감당하셨을까?
그래서 외할머니는 " 혜경아이! 여자가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거는 아인기라. 니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믄 먼저 해라, 남자에게 매달려 살믄 안된데이. 계속 공부 많이 해라 이 할머니가 너를 도와주꾸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어린 시절부터 남성 그리고 결혼에 대한 개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일본에서 자라셔서 일본말과 일본음악 심지어는 일본 음식을 좋아하시고 많이 해주셨다.
그렇지만 내가 중학교 때 공부 하면서 알게 된 일제강점기 역사적 아픔 때문에 일본말을 하시고 일본노래를 부르고 계신 할머니에게 일본 말하지 마시고 일본노래는 듣기 싫다고 투정을 많이 부렸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혜경아! 니는 일본이 싫제 나도 그렇긴 하다마는 그래도 나는 일본에서 살았던 추억이 있는 기라. 힘들고 위험했었지만 행복했는기라. 그리고 느그 외할아버지와 연애했던 기억이 있고, 느그 엄마 낳고 기르던 기억도 있는 기라. 그래서 가끔 그립기도 하더라꼬. 그리고 어릴 때 배웠던 노래와 언어이기에 자동으로 나오는걸 내가 우짜겠노. 어릴 때 즐겨 먹던 음식인데 낸들 우짜겠노. 느무 미워하지 마래이. 그래도 일본은 느그 엄마가 태어난 고향 아이가!"
외할머니 말씀이 그 당시에 다 동의가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다 맞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인생 속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그리운 고향이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여성의 꿈을 이루기를 바랐던 손녀가 결혼을 하고 선교지로 나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지만 외할머니는 내게 결혼했지만 네 꿈을 포기하지 말고 맘껏 펼치라고 늘 격려하셨다.
결혼허락을 받으러 온 남편에게 " 야는 그냥 여자가 아닌 기라 여자라꼬 무시하거나 그런 것을 기대하지 말게나"라고 하셨단다.
남편은 "진작 외할머님이 말씀하실 때 이해를 했어야 했는데.. 결혼해 보니 이제 알겠네 무슨 말인지 여자가 여자다와야 여자지"라고 하며 놀렸다.
외할머니 마음 안에는 늘 여성으로 힘들었던 아픔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항상 몸이 약한 큰딸인 엄마 곁에서 도와주시면서 같이 살아 주시고, 구석구석 필요한 곳을 채워 주셨다.
그리고 조용히 일본어로 된 성경도 읽으시고, 노래도 즐겨 부르시며 해외에서 자랄 증손주들과 소통하기 위해 영어 공부도 하시며 자신만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사셨다.
더 감사한 것은 76세의 연세로 손녀의 가장 힘든 시간에 두 아이를 양육하는 것을 도와주시기 위해 할머니 난생처음으로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파키스탄 까지 와 주셨다.
"혜경아 수고했제! 내가 니 하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왔다 아이가, 니가 여자라꼬 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면 내가 돕는다 했다 아이가, 그 약속을 내가 지키려고 왔다 아이가. 고맙데이 손녀 덕에 내가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네 고맙데이! 인자 괘안타 내가 네 곁에서 일 다 마칠 때까지 도웁꾸마 걱정마래이!"
상황이 너무 벅차서 퉁퉁 부어 있는 내 마음을 외할머니는 다 아시는 듯이 따뜻하고 든든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다.
아들이 없어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외할머니
폐결핵으로 평생 누워 지내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선교를 꿈꾸며 다른 나라에 들어가 온갖 일을 다 겪어내고 있는 손녀
성이 다른 세 여자는 시대와 상황이 달랐지만 모두 치열하게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