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경주 여행 후기

2025년을 마무리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꾸물거리다 새해를 여는 글이 되었다. 어차피 모든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으니 하나로 퉁쳐서 회고와 다짐을 동시에 해봐야겠다. 근데 기억을 되짚어 보려니 망각의 축복을 받아 1년간의 사건들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근래 가장 최근인 경주 여행만이라도 복기해 보았다.


경주여행의 목적은 나의 허세용 취미인 유적지/박물관/미술관 탐방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불국사나 첨성대는 교과서나 한국의 랜드마크로 진득하게 봤지만 계속 봐도 질리지가 않는 상징적 이미지이다. 또 조선의 500년 왕조와 한국의 근현대사가 모두 복잡하게 혼재되어 역사의 밀도가 높은 서울에 비해 경주는 고대의 천년 왕국 신라를 망라하는 도시여서 과거 빛나던 한 시대를 집중적으로 궁금해 할 수 있다. 신라에 대한 상상력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맞아주는 약 17만 점의 유물로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다. 볼거리 많은 이 박물관에서 하루를 보내려고 일부러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짐을 풀고 박물관까지 걸어가는 길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추웠다. 남쪽지방으로 가서 무조건 따뜻할 거라는 오만한 편견을 갖고 얇은 베이지색 코트만 입고 가서 역대급 칼바람에 두피 사이사이가 아리고 뼈가 시렸다. 그래도 덕분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춥다”라는 생각만 할 정도로 단순해지고 여행 루트는 따뜻하고 가까운 실내에 있어야 했기에 핵심 장소만 집중적으로 탐방할 수 있었다.


IMG_3877.jpeg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의 미소)


박물관에서도 선택과 집중이 발휘되었는데, 다섯 개의 전시관, 성덕대왕 신종, 옛 절터에서 수습한 돌탑 중 신라 역사관과 신라 미술관만 빠르게 보았다. 원래는 트럼프에게 선물해 줘 그의 위신을 한껏 세워준 금관을 보고 싶었지만, 화려한 금장구들은 특별 전시로 다 빠진 이유로 투박한 유물을 위주로 관람했다. 전시실에서 한 도슨트 선생님께서 모두 이리로 와보라며 손짓하시길래 따라가 보니 목이 긴 항아리의 토우장식을 가리키시며 “여기 섹스하고 있어요!”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헛것을 들었나 했는데 진짜로 남사스러운 포즈의 토우모형이 나를 맞이하고 있어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나의 박물관 투어의 하이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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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APEC 한미, 한중 정상회담장 포토존이 있길래 밖에서부터 바들바들 떨며 줄 서서 사진으로 남긴 것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다들 이번 회담을 전 세계를 들썩인 전대미문의 관세를 드디어 협상하고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받은 성공적인 외교전이라 평가했지만 앞으로의 전개는 용이 되어 천년이 넘도록 동해를 지키고 있는 문무대왕도 모를 것이다. 역사관 마지막 벽면에 붙어 있는 이수인의 시는 말한다. “서라벌 웅장한 도읍 공적을 이뤘으나, 오늘날 유적은 이름만 남아있네. 황량한 성터 차가운 별빛 하릴없이 빛나고, 반달은 여전히 옛 성곽에 기댄다.” 찬란했던 신라를 이젠 옛 흔적만 남아있음에 대한 무상함으로 기념하듯이 권력의 흐름도, 한 사람의 인생사도 끝나기 전까진 모르는 법이다. 그러든 말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택시 안에서 만난 기사님은 트럼프를 영원히 칭찬하면서 나와 함께 온 애인보고 빨리 결혼하고 애를 네 명 정도 낳아서 애국하라는 덕담(?)도 빼놓으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거친 파도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대왕암처럼, 나 역시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나만의 중심을 지켜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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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추워서 뛰어서 갔던 솔거미술관도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하고 싶은 말은 백마디도 넘지만, 여행담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휘황찬란하다 못해 눈이 아플 정도로 다양한 시각적 자극에서 벗어나 자연의 재료로 만든 고대 유물 앞에서 마음을 비울 수 있어서 관광객 입장으로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주였다.


IMG_3927.jpeg 박선민, <시간의 연결성: 유리서琉璃書>, 솔거미술관


새해의 다짐은 양치 후 치실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점을 선으로 이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은 누가 주사위 돌리기 해서 되는 대로 움직인 말처럼 중구난방으로 튀는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서 여행과도 다름없는 삶이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글 쓰는 일을 부지런히 하려고 한다. 김영하 작가님은 범속한 인간이 초월의 경험을 하려면 시간이 흘러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고,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고 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식된 유물을 복원하여 적당한 자리에 진열하고 그에 대한 안내문을 정성스레 달아놓은 박물관처럼, 이제는 나의 경험들도 묵혀두지 않고 소중하게 닦아 글로써 전시하고자 한다. 때로는 남사스러운 토우처럼 부끄러운 기억일지라도, 그것이 나의 역사를 이루는 소중한 전시물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의 영근 생각들이 타자에게 닿을 땐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더 비장한 각오를 다지자면 나는 더 이상 나의 자격을 의심하며 내가 원하는 미래를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간절한 마음이 종교를 만들어 낸다고 새를 숭상하며 만든 수많은 솟대와 왜적을 해치워주는 만파식적의 전설처럼 누군가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내면 밖으로 나와야 기도를 해주든 응원을 해주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살이에 서툴지라도 나를 의심하기보다 욕심내어 사랑해 보려 한다. 2026년, 나의 박물관에 새로이 전시될 풍경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the end.jpeg goodby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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