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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Sep 08. 2022

이제 집에 있는데..

워킹맘, 퇴사의 세계

이제 집에 있는데 재활용 좀 그때그때 버리지 그래."

맞벌이를 할 때 재활용은 주로 남편 담당이었다. 식사나 설거지처럼 주방에 관련된 일은 그나마 손이 빠른 내가 전담했지만, 재활용만큼은 버려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남편 몫이었다. 몫이었다고나 할까 어차피 담배 피우러 나가는 김에 손에 뭐라도 들고나가면 눈치도 덜 보이고 가사 분담도 했다고 인정받는 거라는 거 알고 있다. 재활용하는데 꼬박 삼사십 분이 걸려도 불만은 없었다.  역시 화장실 동굴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한 시간씩 앉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랬던 남편이 이제 딸랑 담배만 피고 온다. 나가는 김에 예전처럼 재활용 쓰레기를 좀 버리고 와 될 텐데 말이다. 나 역시 그때그때 버리면 될 재활용 쓰레기가 영 내키지 않았고 습관이 안되어 나가는 길에 들고 가는 걸 자꾸 까먹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재활용이 매번 산더미처럼 쌓이자 남편이 참았다는 듯 내뱉은 다. 몹시 기분이 나빴지만 부인할 수도 없었다. 이제 재활용 정도 매일매일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많은 전업이니까.  

  

“ 이제 집에 있는데 집밥 좀 해 먹어라. 아이들이 외식에 길들여져서 건강이 영 아니더라.”

코로나로 통 와보시지 못다 겸사겸사 며칠 다녀가신 시어머님의 카톡. 퇴사 이후 어머님의 카톡도 늘었다. 모든 음식을 직접 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님과 달리 여전히 배달 음식도 먹고 반찬까지 사 먹는 식습관이 마음에 안 드셨던 다. 게다가 이제는 일도 안 하고 집에 있는 며느리가. 밖에서 먹는 음식은 죄다 먹지 못할 음식 취급하시는 당신은 집에 있는 시간도 많아진 며느리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밥을 안 해 먹는다 생각하신 게다.

“ 그런데 어머님! 집에 있다고 꼭 집밥만 먹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따져본다. 물론 머릿속으로..

   

'이제 집에 있으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집에 있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저 정도는 해야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물론 이제 집에 있으니 제발 푹 좀 쉬라며 걱정해 주는 이도 많다. 그동안 너무 일만 했는데 이젠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이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MC가 지나가는 꼬마에게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가수 효리가 “ 왜 애들한테 자꾸 뭐가 되라고 그래요? 얘야, 커서 아무것도 안돼도 돼. 괜찮아.”라고 해서 잠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모두 무언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회에 던진 효리의 그 한마디가 꽤 신선했다. 보기에 그럴듯한 사람이 되어야만 인정받는 사회에 꼭 무언가 되어야 하느냐고 귀여운 경고를 날리는 효리가 멋져 보였다. 




40대가 되어서도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걸린 건지 뒤처지는 느낌에 불안했다. 더군다나 퇴사하고 나서는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경쟁할 상대도 없는데 말이다. 따야 할 자격증도 없는데 여전히 무어라도 따야 할 것 같고 신문을 하루라도 안 읽으면 숙제를 안 한 것 같다. 화장 안 했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것 봐 퇴사하니 관리도 안 하네' 하는 소리를 들을까 비비크림을 바르고 집을 나선다. 살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 될 것 같고, 나이 들어 보이지 않게 피부관리도 해야 할 것 같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을라치면 어딘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미난 드라마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다가도 문득문득 불안했다. 뒤처질 것 같아 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 먹일 음식도 직접 해보자 싶어 부지런히 돌밥을 했다. 요리는 젬병인지라 하루 세 번 밥을 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한참 크는 나이라 그런지 방금 밥 먹고 돌아섰는데 이거 달라 저거 달라 간식 주문을 해대는 통에 식탁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을 틈이 없었다. 아이들 요구대로 부엌 여기저기를 오가며 하루 수십 번씩 냉장고 문을 열고 닫았다. 아들 둔 엄마는 말년에 주방에서 일하다 죽는다더니 진짜다 싶다. 그 와중 요가도 빠트리지 않았다. 틈틈이 우리 집 막내 강아지 산책까지. 신문 읽기, 책 읽기. 유튜브 시청에서부터 셔틀이 오지 않는 학원 라이드며  간식 공수며 이리저리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달이 지나고 나니 몸도 마음도 지친 듯했다. 여유 있는 시간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지.,     


'이제 집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에 반발심으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집에 있는 사람 맞는데. 직업이 없다고 쓸모없사람도 아닌데. 살림만 해도 중받아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 되는데 쓸데없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서 더 바쁜 사람으로 몰아붙인 게 아닌가 싶다. 집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각자의 고유한 일이 있고, 그 일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누구든 나를 얕잡아 봐서도 안되고 스스로 낮아질 이유도 없다.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면 되고 억지로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짜증에 자존감이 낮아질 이유도 없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며 속상해할 이유도 없다. 육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예측하기 힘들지만 현실을 인정하묵묵히 생활하면 될 일이다.     




“언니, 혹시 도서관에서 자원봉사해보지 않을래요?”

“같이 독서모임 하지 않을래요?”


동네에도 오늘의 일상을 열심히 일구는 많은 엄마가 있다. 오랜 조직생활과 사람에 지친 나로서는 어쨌거나 또 다른 조직원이 되는 게 두려워 참여하지 않았고 다행히 이런 모임은 강제성이 없으니 거절하면 그만이다. 회사는 강제성이라는 것이 있다. 어제 아무리 술을 먹고 숙취가 심하더라도 출근을 해야 하고, 몸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혹은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해도 출근해야 하는 그런 강제성 말이다. 지각할세라 지하철 환승역에서 헐떡이며 달려야 하고 비좁은 지하철 속에서 온 몸에 힘을 주고 있다 출입구 문이 열리자마자 용수철 튕기듯 튀어나와 달리게 그런 힘의 원천이다.    

 

퇴사 후 삶에는 그런 강제성이 없다. 자유의지가 있을 뿐이다. 이성을 최대치로 끓어 올려 자연스레 몸이 반응하는 힘의 원천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나의 자유의지이니 많은 것을 할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다.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행동 장치를 만들 수도 있지만 회사의 규율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켜내야 할 나만의 루틴이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나처럼 스스로를 혹사시킬만큼 힘들 필요는 없지만 조금씩 지켜내면 된다, 회사의 사칙보다도 중요한 나와의 약속. 강아지를 보살피는 것.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 늘 직접 해먹여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 끼니를 잘 챙겨주고 육아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 


도시락을 팔아 영국 부자 345위에 오른 <켈리 델리> 켈리 최 회장님도 이야기했다. 나와 계획하고 나와 다짐하는 일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좀 빈둥거리며 드라마도 보고 늦잠을 자도 된다. 남들이 한창 일할 낮시간에도 좀 뒹굴어도 된다. 하지만 회사에서 업무 순서를 정하는 것처럼 집안일에도 순서가 있게 마련이고 회사처럼 숏텀, 롱텀 비전이 있듯이 엄마에게도 비전과 모토가 있으며 이루고 싶은 꿈도 있다. 산책 가고 싶어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강아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엄마라는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은 무엇보다 존중받아 마땅하며 매일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겠다고.


(사진출처. GS칼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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