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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Aug 10. 2022

부모님이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내 인생

워킹맘, 퇴사의 세계


“ 어머,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은행도 계속 잘 다니고 있지?”

“ 으응. 언니 잘 지냈어요? 정말 너무 오랜만이네요. 제 소식 못 들으셨구나. 저 은행 관뒀어요. ”

“ 어머~정말?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언제 관뒀어?”

" 이제 일 년 다 돼가네요.."


친정 엄마와 이모는 무슨 애인 사이아니면서 매일같이 전화하며 점심은 몇 시에 누구와 먹었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니 십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촌 언니이긴 해도 이모 딸인 사촌 언니가 내 퇴사 소식을 모를 리 없다. 8남매 막내인 친정 엄마. 그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크면서도 무난하면서도 착한 딸로 소문나 있었다. 그 착하다고만 들었던 막내다니고 있던 안정적인 직장을 퇴사했다 하니 사촌 언니도 조금 의아해하는 눈치다.


사촌언니가 모른다는 건 친정 엄마가 외가 친척 그 누구에게도 딸이 퇴사했다는 얘기를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든든한 직장에서 돈도 잘 벌고 대단하진 않아도 사회적 지위도 누리며 남들에게 자랑거리인 딸이 정년도 아닌데 갑자기 퇴직을 했다는 얘기를 도저히 꺼내지 못했나 보다.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친정 엄마가 퇴사한 내가 부끄러웠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렸다. 퇴사한 지 일 년이 다돼가는데 말이다.

     

“어, 나야. 잘 지내? 그때 만든 법인카드 있잖아. 그거 재발급하려고 하는데 어떤 서류 들고 가면 돼? 내일 시간 괜찮아? ”

법인 업무로 종종 연락을 하는 사촌 오빠 역시 나의 퇴사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퇴사 소식을 온 동네방네 알리기도 민망했기에 여기저기 인사하지도 않았지만 친정 부모님 역시 내 소식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지난번에 추천받고 가입했던 적금 말이야, 사정이 생겨서 해지를 좀 할까 하는데 괜찮아??”

또 다른 친척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3번째 정도 되니 당황하지도 않는다.

“언니, 실은 저 이미 퇴사했어요. 적금은 필요하시면 언제든 해지하셔도 돼요. ”

“아, 그랬구나. 안 그래도 바쁜데 핸드폰으로 연락하기 그래서 은행으로 전화했는데 그런 직원이 없다는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어. ”     


아이를 위해 사회적 지위, 체면은 쉽게 버릴 수 있다 해도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입에 풀칠조차 어려웠던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비교적 여유 있는 세대이지 않은가. 시켜달라는 공부 다 시키고 학교도  보내주 잘 키워뒀는데 잘 다니기만 하면 되는 직장을 관두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부모님 눈에 응석 따위로 비칠 뿐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낸 친정아버지에게는 특히 배부른 소리일 게 분명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는 일제강점기에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보려고 고향을 등지고 오사카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란 여전히 기본 처우를 받으며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일하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느끼기도 찰나, 할아버지는 피붙이들을 남겨둔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친정아버지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을 못 하는 어린아이였고,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르는 게 의미가 없어진 할머니는 4형제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죽어라 일하고  번 돈으로 고향에서는 그나마 기반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잠시 척박한 고향 제주에서는 일거리가 없어 형편은 계속 악화되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시키려 다시 오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 셋째인 친정아버지와 막내 삼촌은 할머니와 제주에 남았다. 애플 TV에서 제작한 재일 동포 이야기 '파친코'가 나에게는 아니 친정아버지에게는 생소하지도 않은 아픈 가족사 그 자체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막내 삼촌과 중학생이었던 친정아버지는 일본에서 보내오는 형님들의 생활비로 근근이 공부를 했고 다행히 두 동생은 형님들의 정성을 알아서인지 공부를 곧잘 해냈다. 사는 게 힘들어도 함께 의지하는 가족이 있기에 행복했던 시절은 할머니가 고작 복막염으로 돌아가시끝나버렸다.


형님들은 결국 고향에 돌아올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일본에 영영 눌러앉게 되었고, 친정아버지는 혈혈단신 코흘리개 어린 남동생과 남게 되었다. 형님들이 생활비를 보내준다 해도 친정아버지 역시 어린 학생뿐이었는데 힘들게 코흘리개 어린 동생을 아들처럼 키워냈다. 그렇게 낮에는 학업에 전념하고 밤이면 동네 약국에서 쪽잠을 자며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은행 시험에 합격해 주변의 많은 축하를 받았다.


어릴 때 기억 속 친정아버지는  당당했고 경제적으로도 자리를 잡은 나름 성공한 은행원이었다. 사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알게 된 것도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어렵게 자라 믿을 구석 하나 없었던 친정아버지는 자존심이 매우 강해 자신의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식들에게조차 하지 않았던 거다. 그런 친정 아버지에게 IMF가 터진 뒤 본인마저 명퇴를 한 상황에서 막내딸이 은행에 취업하고 자리 잡아 은행 지점장 정도 꿈꿀 수 있다는 건 자랑이었지 싶다.


몇 년 전 어렵사리 운을 떼어 들은 친정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더욱 관둔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퇴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를 무렵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 관문이 바로 부모님이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살짝 퇴사라는 단어를 내비쳤을 때 친정아버지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딱 내저으시는 바람에 더욱 용기가 나질 않았다. 부모님의 기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부모님의 기대가 내 행복보다 우선인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

  





먹고살기 힘든 60년대에 죽어라 일하는 게 미덕이었다면 75년생인 내가 살던 시대는 장래 희망 1, 2, 3 순위가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였다. 마치 인생의 목표는 공부를 잘해서 전문직이 되어야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문직이 아니라면 대학 졸업 후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고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대기업에 들어가 안정적인 수입을 창출하는 것만이 취업의 목표였던 시절이었다. 수학을 잘하면 이과, 수학을 못하면 문과, 이과에서 공부를 잘하면 의대, 의대를 못 가면 공대, 문과에서 공부를 잘하면 법대, 경영대, 사범대 이런 식이었다. 대학 졸업반이 되면 무슨 일을 하기 원하냐 보다는 어느 대기업에 지원할지가 관건이었다.


적어도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IMF가 터지자 취업 시즌에 학과 사무실에 속속들이 도착하던 대기업 입사지원서는 더 이상 들어올 리 만무했고 부모님들은 찬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명퇴를 당했다. 친정아버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치킨집을 차렸다가 망했다더라 생활고에 자살했다더라 이런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졸업을 맞이한 나는 어디라도 취업이 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어느 날 퇴사하고 은퇴 후의 삶이 익숙지 않았던 친정아버지는 매일같이 신문을 몇 시간씩 읽으시곤 했는데 신문 한 구석 아주 조그맣게 난 은행 신입 인턴행원 100명 모집 기사를 가위로 오려와 나에게 내밀었다.


“ 여자가 은행 들어가서 일할 수만 있으면 안정적이고 좋지. 아빠도 은행 다니면서 여행원들 보니 결혼해서도 다닐 수 있고 참 좋아 보이더라. 이거 한번 지원해 보지. ”

 

은행원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에게 딸이 은행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살면 좋겠다 싶었던 거다. 실제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매우 안정적이다. 안정적인 급여뿐만 아니라 둘째라면 서러울 복지 정책, 대기업임에도 여성 인력이  많아 아무래도 여성에 대한 처우도 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다.



제임스 아서 레이 <조화로운 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가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라. 그저 다른 사람에게 좋게 들리는 목표이거나, 자신을 무시하는 목표이거나, 당신에 대한 부모님의 꿈을 이루려는 목표는 안 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노려보며 ‘왜 그런 걸 원하느냐라고 묻는다고 해도 당신은 ’ 내가 원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을 이기적이라거나 탐욕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들의 일이니 당신이 신경 쓸 것 없다. 당신의 목표는 당신 것이다. 그러니 한 시도 멈추지 마라. 그들이 당신을 통해 배우거나 말거나.'


 육아휴직 중 영어 스터디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각자 연령이 다른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과 함께 영어공부를 하며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었다. 어느 날 함께 읽은 스티브 잡스의 대학 졸업 연설문에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아직 찾지 못했더라도 계속해서 찾으세요. 안주하지 마세요. 마음에 관한 모든 일이 그렇듯 찾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됩니다.'


여태껏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안정적이고 돈 잘 버는 직업을 택해서 살아왔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노력을 해보지 않았고 다른 길에 도전해 볼 용기도 없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언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고 그 여정은 무려 7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여러 해의 시간을 거치며 나의 생각, 나의 꿈을 숙성시키는 데에 시간을 들였다. 그것은 부모님이 나에게 거는 모든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는 과정일지 모르지만 온전히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이었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기도 하는 크게 돈과는 상관없고 안정적인 생활과도 상관이 없지만 해야 된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가슴 설렘, 부푼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매일같이 전화하며 일상을 나누는 이모들에게조차 막내딸의 퇴사 소식을 알릴 수 없는 못난 딸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님이라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 않은가. 부모님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내 인생이니 말이다.


(그림 출처. 빨간 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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