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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Mar 30. 2022

직장인의 초상(3/3)

워킹맘, 퇴사의 세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한 내가 벌을 받는 것 같다. 인사이더가 되지 못하고 점점 아웃사이더가 되고 있는 것 같. 손을 번쩍번쩍 들어대던 그 옛날 호기어디 가고 자꾸자꾸 움츠러든다. 열심히만 하면 웬만해서 누락되지 않고 승진 정도 무난히 하는 30대와는 차원이 다른 40대. 열심히 해도 순위권에서 벗어났다면 인정받지 못하 때론 죽어라 이룬 성과가 다른 이의 공치사가 되기도 한다. 내 꿈이 아니라 상사의 운신을 위해 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냉정한 비판을 받고 치열한 경쟁을 해내야 한다. 매일매일 엑셀 속 등수를 확인한다. 내 실적, 우리 팀 실적, 우리 지점 실적, 우리 그룹 실적. 그리고 오늘 실적, 이번 주 실적, 월별 실적, 분기 실적, 반기 실적, 연간 실적 그렇게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 확인한다. 어느새 엑셀 시트 위에서 내 인생의 희로애락이 결정되고 있었다.


40대는 객기를 부리며 박차고 나와 쉬이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젊은 나이도 아니다. 결국 조직 내에서 극명하게 갈리는 운명을 경험해야 한다. 급여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엔 먹고 기술도 없어 덜컥 관두기 겁나는 애매한 나이니까. 30대에는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과 해보지 못한 깊은 고민들이 밀려온다.  







그래도 몇 번의 도전 후에 승진이라는 중요한 고비는 잘 넘겼지만 그렇다고 엑셀 시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고민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엑셀에 더욱 집착하는 일상의 연속이다. 결국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라는 본질에 다가가야 했다. 여전히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늘 그래 왔듯 깊은 고민 없이 일하고 있을 테지만 이미 고민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소중한 인생이 대체로 나를 잘 모르는 인사부 직원의 엑셀 시트 위에서 결정된다사실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를 반기지 않는 지점에 보내도 그곳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해왔으면서.. 그게 내 인생의 전부라 생각했으면서.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했으면서.


내 능력과 성과에 대한 파악이 끝난 그들의 클릭 몇 번에 존중받아야 할 인생이 결정되고 있었다. 그런 평가받을 만한 사람 아니라고 외쳐봐야 소용없는 현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택받더라도 결국 내 인생의 전권은 다른 사람이 쥐고 있는 현실. 내 인생은 여전히 엑셀 시트 위에 존재한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건 이미 그들에 대한 의구심이나 질책이 아닌 온전히 내 문제라는 걸. 내 인생을 저 되돌아봐야 한다는 걸.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건 결국 나니까. 서무를 하겠다며 자진해서 손을 번쩍 들 때 만족해하셨던 지점장님이 훗날 술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고 과장,  넌 꼭 지점장이 될 거야. 넌 충분히 될 수 있어"


퇴사를 고민하면서도 종종 머릿속을 맴돌며 왠지 아쉬웠던  지점장님의 그 말씀에 살짝 대답해본다.


" 저는 지점장이 제 인생의 목표가 아닌 것 같아요.

저에게 좀 더 의미 있고 소중한 찾아야겠어요. 설령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라 해도요."



<사진 출처 :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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