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는 한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서류로나마 관찰하게 된다. 병원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직접 목격하는 의료인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돈과 관련된 인생의 단면, 특히 어두운 단면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 가족사와 함께 꼬여 버렸을 때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면 헤어짐과 관련된 이혼, 상속 같은 상황 말이다.
이혼이 잦은 요즘은 미성년자의 친권자를 확인해야 하는 업무가많다.한 엄마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매달 적금을 꼬박꼬박 불입했고 이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모았다. 몇 년 전 야근을 하던 은행원은 만기 경과 예금을 관리해야겠다 싶었다.
'어? 만기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안 찾아가셨네? 자녀 명의라서 잊고 계신 건가?'라고 생각하며 등록된 번호로 전화를 했다.
"OOO부모님 되시나요? 만기가 지난 자녀분 예금이 있어 전화드렸...."
"네네, 안다고요. 해지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또 전화했어요!"
다짜고짜 화를 내는 전화기 너머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미 다른 직원과도 여러 번 통화를 한듯했다. 이유인즉슨 배우자와별거에 들어갔는데 급한 사용처가 생겼다. 아이 명의 예금을 해지하러 은행에 갔더니, 아이 아빠도 함께 와야 한다는 답을 들었던 것이다.
"애 아빠가 넣은 게 아니고 제가 넣었다고요,
신규 할 때 누가 왔는지서류를 보면 알 꺼아니에요"
"네, 고객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서류상 부모가 모두 친권자이면 함께 내점해야 미성년자인 자녀 예금 해지가 가능하다. 아예 이혼을 했다면 친권자인 엄마만(친권자가 엄마라면) 내점 하면 되지만 별거 중이다 보니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할 수도 없고,별거 중인 남편에게 같이 와 달라고할 수도 없다. 은행원으로서는 함께 공감을 해드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퍽 난감했다. 서류가 모든 본질을 꿰뚫지는 못하지만 아이 예금은 해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황상 문제가 없다면 소액 예금의 경우 친권자 중 한 명만 방문하여도 책임자급 이상의 직원이 판단하여 해지가 가능하기도 하다.(은행마다 내규는 다름) 하지만 금액이 커지면 돈이란 예민한 녀석과 연관된 직업이다 보니 분쟁의 소지가 있는 업무처리로 남의 가정사에 휘말릴 순 없는 노릇이다. 간혹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이 은행원을 사이에 두고 조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조율해드린다고 한 것이 결국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고차장이 그리 하라고 해서'가 되어버린다.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고차장!" 하시며 방문하던 70대 남성 고객은 재발한 암이 급속도로 번져버렸다. 나날이 쇠약해지시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안 좋아지셨다. 자금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기셨는지 배우자분이 돈을 찾으러 갈 것이라 했다. 입출금통장에 한해 통장 실물이 있고 도장이 맞고 비밀번호가 맞으면 누가 방문하던 은행은 그 출금에 응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해프닝이 일어났다. 전화로 비밀번호를 불러주기로 한 고객님이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당황한 배우자의 목소리톤은 갑자기 올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문한 배우자는 고객의 두 번째 부인이며 다른 자녀와의 상속관계에 놓여 있었다.우여곡절 끝에 상황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돈이란 녀석이 나빴다.. 고 생각한다.
황혼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는 시대이다. 이전 배우자의 자녀와 현 배우자 사이의 상속관계가 점점 더 복잡해질 것임은 분명하다. 방카슈랑스 상품을 판매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보험이라는 상품의 특성상 장기상품이기도 하고 사망 시 상속인을 지정하는 난이 있다. 법정상속인으로 기본 설정이 되어 있고 유류분 제도가 있기 때문에 대개는 특별히 누군가를 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끔 주부 고객의 경우 가입한 다음 날 전화가 온다. "상속인을 변경할 수 있나요? 법정상속인 말고 자녀로만 지정하고 싶어요." 부부 사이가 나쁘지만도 않다. 잉꼬부부는 아니더라도 서로를 꽤 챙기는 현실 부부다. 하지만 돈에 있어서는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라고 선을 그어두고 싶다는 거다. 돈에 대해서는 평소 객관성을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명한 조치(?)라 생각했다.
죽음과 돈 앞에서 초연한 고객도 있다. 지방에서 근무하던 시절, 지방에서는 드물게 개성 있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던 60대 여성 고객이 있었다. 80년대 미스코리아처럼 화려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파티에 입고 갈 듯한 드레스를 입고 나오시던 세련된 고객이었다. 젊은 시절 미국 이민을 가서 뉴욕에서 살다 오셔서 그런지 같은 연배 고객보다 감각이 남달랐다. 한동안 통 은행에 나오시질 않아 궁금하던 찰나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차장님, 전데요,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와 있어요. 아무래도 몇 달 못 살 것 같아요... 제 '사망'시 가지고 있던 펀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치 내 펀드 수익률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하듯 물어보셨다. 결국 사망 전에 본인의 펀드를 배우자분께 모두 넘겨주고 싶어 하여 사전(死前)에 양수도절차를 밟았다. 얼마 후 나는 배우자의 펀드를 관리해 드리게 되었다.
상속절차를 밟기 위해 건네는 사망진단서에 적힌 사망 장소와 사망 원인을 보며 이 분은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찰나의 상상을한다.
"인간은 죽은 이에게 자연스러운 경의를 표한다. 상대는 방금 전에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돈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위업 달성 전에 돈에 대한 정리도 해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입밖에 꺼내기 꺼리는 주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가끔은 감성적인 부분을 덜어내고 이성적인 판단도 해 두어야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