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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Nov 02. 2018

추억의 명수필 감상

이양하의 신의(新衣)



 

신의(新衣)

 이양하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여름옷을 한벌 장만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옷감의 선택이 좋지 못하였다. 전등불 아래 보는 빛이 수수한 브라운이요, 세로 박힌 무늬는 무슨 빛인지 분명하지는 아니하나 어떡하면 브라운의 너무나 겸허하고 단조함을 깨뜨리고 델리킷한 뉘앙스를 보여줄 것도 같아서 달리 더 생각지 아니하고 맡겨버렸다.

그러나 옷이 다 되어 막상 입고 나서니 전등불 아래서 보던 빛과는 아주 딴판이다. 전체의 기조(基調)가 되는 브라운이 겸허한 브라운인데는 틀림이 없으나, 세로 간 줄무늬는 이제 보니 바이올렛, 그것도 아주 선명한 바이올렛이요, 그것이 지색(地色)의 브라운과 어울리어 나타내는 빛깔은 보랏빛에 가까운 이상한 뉘앙스의 빛깔이다.

바이올렛 자체로 말하면 누구나 다 사랑하지 아니치 못할 꽃의 하나요, 그 빛깔도 아름다운 빛깔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랏빛 내 옷빛으로서의 보랏빛 그것은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쳐지는 빛이다.

나는 의복에 있어서는 역시 ‘훌륭하게, 그러나 호화롭지 않게’ 하는 셰익스피어의 가르침을 무엇보다 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자로, 청초하고 아담하게 입으려고는 할망정 호화롭게 입으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는 자이다.

그런데 바이올렛 내지 보라로 말하면, 화려하고 호사한 빛일 뿐 아니라, 첫째로 보아 여름에 입어 마땅하다 할 만한 서늘한 감촉과는 도대체 인연이 먼 빛 아닌가.

여기 오래간만에 새옷은 입었으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더욱이 상당히 좋은 취미를 갖고 또 그림을 한다고 하느니만큼, 그의 색채감에 각별한 신뢰를 두지 아니하지 못할 동무의 하나가 새옷 입은 나를 평하여, 봄바람에 불리어 돈푼이나 쓰고 다니는 시골뜨기 같다고 한 이래, 나의 괴로움이란 그야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학교에 가서도 도무지 일이 손에 붙지 아니한다. 그리고 만나는 동료들이 혹 내 옷을 화제로 삼는 때는, 물론 오래간만에 해 입은 옷이니 인사 겸 이야기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련마는 어째 나의 악취미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7, 8세 때의 조급(躁急)을 아직 가지고 있었던들 나는 그 당장에 옷을 벗어 메때렸을 것이다. 아니, 지금에 있어서도 내가 쉬이 또 하나 다른 옷을 장만할 만한 여유만 가졌다면 이 옷을 집어치운 지 이미 오래겠다.

나의 취미란 이러한 데 취미란 말을 쓸 수 있을는지 의문이지마는 대개 이렇게 까다롭고 결벽스러운 것이다. 아니, 까다롭고 결벽스럽다느니보다 어떤 독자는 옹졸하고 새살스럽다고 빈축할는지 알지 못하겠다. 나 자신이 나의 청탁(淸濁)이 이다지도 심하지 아니하였던들 나의 일상이 좀더 평탄한 것이 되지 아니할까 하고 반성하는 때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와 같이 사소한 일에 이렇게 마음을 쓰는 소심한 사람이 음식, 거주(居住), 오락, 독서 기타 백반사상(百般事象)에 처하여 겪을 괴로움을 생각하여 보라. 그야말로 이마에 잔주름 펼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또 한편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신변의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취미를 살리려고 힘쓴다는 것은 그렇게 일소에 붙일 일이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의 보통 가정에 가면 흔히 이가 시릴 듯한 괴상한 빛으로 대문을 채색하고, 또 벽에는 노상에서 파는 정체 모를 산수도(山水圖)니, 미인도(美人圖)니 하는 것을 붙인 것을 본다. 그리고 또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는 악취미에 틀림없는 한 개의 파라솔, 한 감의 치마를 사기 위하여 밥 한두 끼 굶는 것쯤은 사양하지 아니하는 가두(街頭)의 여성을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그저 웃어버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것은 말하자면, 그들의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마음, 우리의 이 어지러운 주위보다는 한걸음 높고 맑고 깨끗한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엉클어진 잡초를 잡아젖히고 그 가운데 한 송이 꽃을 피워보고자 하는 갸륵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이 세상을 무지와 빈궁과 조악에서 건지고자 하는 학자나 정치가나 종교가의 노력에 못지 아니하게 귀한 노력으로 잘 이끌고 북돋우기만 하면 족히 이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잠깐 스스로 이렇게 변명해 본다. 그러나 한번 다시 벽에 결린 옷을 돌아볼 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악취미는 역시 틀림없는 악취미다.
  
이양하(1904-1963) 수필가, 영문학자
출전 2005 신록예찬 을유문화사


@이양하의 <신의(新衣)>를 읽고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이양하수필집>의 첫 장을 장식하는 <신의(新衣)>는 요즘의 개정판 에서는 <새옷>으로 수록 되어있다. 이 수필은 여러 면에서 그의 성품과 수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여름옷을 한 벌 장만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옷감의 선택이 좋지 못하였다. 전등불 아래 보는 빛이 수수한 브라운이요, 세로 박힌 무늬는 무슨 빛인지 분명하지는 아니하나, 어떻거면……. 그러나 옷이 다 되어 막상 입고 나서니 전등불 아래서 보던 빛과는 아주 딴판이다."

이 글은 그의 다른작품에서 보여주는 지적이고 관념적인 수필이 아니다. 단순한 생활의 관찰이다. 쉽고 솔직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이 수필을 내가 골랐는지 모른다.

도쿄대학의 수석 졸업생인 엘리트 교수가 옷에 관해 이런 까탈스러움이 있다니. 결벽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의 모습이 한자락보인다.

"여기 오래간만에 새 옷은 입었으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더욱이 상당히 좋은 취미를 갖고도 그림을 한다고 하느니 만큼 그의 채색감에 각별한 신뢰를 두지 아니하지 못할 동무의 하나가 새 옷 입은 나를 평하여 봄바람에 불리어 돈푼이나 쓰고 다니는 시골뜨기 같다고 한 이래의 나의 괴로움이란 그야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학교에 가서도 도무지 일이 손에 붙지 아니한다."

나름 한 멋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던 그에게 그림을 하는 친구의 악평은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터이다. 옷 한벌 잘못 맞춰입은 후의 자신의 마음과 주변의 시선을 그렸다.

이런 자신의 예화를 바탕으로 주변의 별난 개인적인 취미나 취향에 대해 열거하며, 비록 나와 맞지 않아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상대에 대한 이해의 경지를 촉구하는 것이다. 남들 눈이 무서워 더 높은 곳으로의 진일보를 거두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평범한 수필의 골격에 머물긴 하였으나, 그의 결벽과 소심을 천하에 드러내어 놓은 이 수필은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충분하다. '가감없는 정직함'이 수필의 덕목이란걸 보여주었다.



@이정아의 ‘새옷’

새 옷

이정아

춘분이 지나고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겨울이 그냥가기 서운해 마지막으로 용을 쓰는 듯 하지만 그래도 봄은 오고야말 것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켠 티비에선 봄단장을 하라며 홈쇼핑의 호스트들이 고운 빛깔의 봄옷을 선보이면서 소비자를, 여인들을 유혹한다.

새 옷을 두벌 장만했다. 차라리 지름신이 강림한 것이라면, 봄옷 이었더라면 오죽 좋으련만. 근래에 구입한 옷 중 가장 비싼 돈을 치렀지만 색상도 재질도 디자인도 맘에 안 든다. 옛날 장수들이 전쟁터에서나 입었을 법한 디자인의 플라스틱 뿔갑옷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닐 텐데 갑옷은 웬일인지...입으면 위풍당당은 커녕 불편하기 짝이 없다. 다른 한 벌은 레이스장식 없는 코르셋으로 쇠막대와 끈으로 된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우울한 옷이다.

오랜 병원 생활로 걷는 것이 시원치 않아서인지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였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미련하게도 고통을 참다가 결국은 응급실 신세를 지고서야 3군데의 요추 압박골절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의 수단으로 장만한 것이다. 그러니 옷이 아니라 보조기구인 셈이다. 갑옷은 실내에서 코르셋은 병원 갈 때의 외출용이다. 평소 옷을 좋아하던 나이지만 이런 옷 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자세로 거의 한 달을 보냈다. 신장 이식이 잘 못 되었을까하여 전전긍긍하고 겁을 먹다가, 그래도 원인을 알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진통제로 통증을 다스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낫는 날이 온다고 하니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수술이 잘되었다고 희희낙락하며 지나치게 교만했나보다. 면역억제제와 스테로이드를 오래쓰면 뼈가 약해진다고 낙상을 조심하라는 주의 사항도 들었지만 귀에 담지 않았다. 그저 감염만을 주의하고 마스크만 챙겨 썼는데 그런 복병이 있을 줄이야. 더 큰 사고를 대비해 경고를 준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극심한 고통은 난생 처음이다. 수차례의 수술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감사하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면 애벌레처럼 기어서 “주님 살려주세요.”를 100번은 외쳐야 했는데 이젠 고작 10번만 외치면 일어날 수 있다

“하루나 이틀, 누워서, 앓으며, 집에서 혼자 산 것도 산 것은 산 것입니다.
불치병 걸려 한 해나 두 해 고통 받으며 산 것도 산 것은 분명 산 것입니다.
여전히 감사한 목숨입니다.”
순명/나태주

요즈음 절절하게 와 닿는 시이다


한국수필 11월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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