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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Mar 31. 2020

무심한 듯 유심하게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이 아침에] 무심한 듯 유심하게 

                  이정아/수필가
  
얼마 전 국제펜클럽 미주본부 주최 봄 문학 세미나가 있었다. 한국의 서정시인인 허형만 시인을 강사로 모신 강연이었다. 많은 내용이 좋았지만 마지막 한마디가 와 닿았다. "아무 생각 없이 쓴 글과 아무 생각 없는 듯 쓴 글은 천양지차" 라는 말이었다.

원전은 조선말의 화가 양기훈의 영모도(翎毛圖)를 보고 친구인 백련 거사 지운영이 쓴 찬의 일부 '아무 생각 없는 듯 그린 것이 너무 좋아서 미울 정도네(行其所無思可愛可憎)'인데, 글도 마찬가지라며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아무 생각 없는 듯 쓰려면 많은 수련을 거쳐야 가능하고 그런 글이 진짜 글이며 감동을 준다는 말이다. 200% 공감했다.

나처럼 일상에서 나온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사건이 생겨야 그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거나 누굴 만나든가 아무튼 뭐든 해야만 글감이 생긴다.

하지만 나와는 대조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 상상을 보태어 쓸 수 있는 문인도 있다. 단어를 적절히 고르고 종종 전문용어를 섞어 쓴다.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는 경박한 글을 쓰는 나는 그런 유식한 사람들이 신기하다. 때론 감탄한다. 무척 깊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부럽지는 않다. 그런 글은 자신의 독백일 뿐,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글이란 내가 쓰고 있는 수필에 한한 것이다. 시나 소설은 당연히 상상이 결합된 장르이므로 허구가 많이 허용되지만 말이다.

한 미주 문인의 웹사이트에 갔다.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엄청 미화를 시켰다. 블로그나 페이스북처럼 오픈된 곳에서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는 이들의 머릿속은 어떤 구조일까? 이곳 사람들은 알만큼 알고 있지만, 한국에 계신 분이나 타지 사람들에겐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오도된 글과 사진이 빽빽하다. 올려진 글만 보면 대단한 능력자에 자산가에 넉넉한 인품으로 기부천사 역할도 하는 사람으로 비쳐진다. 그의 이곳에서의 일상을 비교적 자세히 아는 편이어서 슬펐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런 양심으로 감히 문학을 하려 하다니.

경수필에 길들여진 나는 어려운 글은 잘 안 읽게 된다. 문장에 치여 글에 생동감이 없고 중간쯤 읽으면 머리가 아파 온다. 그렇다고 가벼운 글을 전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가볍거나 중후하거나 간에 수필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 보이는 글이므로 정직함이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독자와 소통이 안 되는 글은 생각 없이 쓰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을 내기 위한 과시용 함량 미달의 글을 자주 발표하다 보면 그것이 자신의 수준으로 굳어 버린다. 요즘엔 인터넷의 발달로 한 번의 클릭으로 누구나 명문장을 쉽게 접한다. 독자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말이다. '생각 없이 쓴 글'인지 '생각 없는 듯 쓴 글'인지 독자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작은 글 한편이라도 숙고해서 성실하게 써야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너무 좋아서 미울 정도의 글을 죽기 전에 한번 만이라도 쓰고 싶다.


[LA중앙일보] 03.30.15 22:59

2020.03.30 일부수정


양기훈의 화조영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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