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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Feb 02. 2021

떠나야 보이는 것들


[이 아침에] 떠나야 보이는 것들

이정아/수필가
[LA중앙일보] 01.31.17 23:23
    
아침저녁으로 혈압약, 면역억제제, 스테로이드에 각종 비타민 등 한 움큼씩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식성이 좋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장기 이식 환자는 평생 먹어야 하는 약들이므로 내 식욕에 감사한다. 뭐든 잘 먹으니 약 먹는 건 일도 아니지 뭔가.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은 가야 하는 병원 출입. 이것도 감사하다. 투석할 땐 일주일에 세 번씩 가서 죽음의 문턱까지 왕래하다 곤죽이 되어오곤 했는데 한 달 두 번은 가볍지 않은가? 잠시 따끔한 피검사를 견디고 닥터의 조언을 착한 학생처럼 들으면 되니 예전에 비하면 마음 편한 병원 출입이다.

병원에 일찍 가서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많은 동지를 만난다. 투석 중인 이들을 보면서 예전 고통을 추억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이식 수술 대기자들에겐 선험자인 내가 관심대상이어서 질문들이 많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하여 전전긍긍이다. 수술 전후의 주의할 점, 식생활과 운동 등 환자의 섭생에 대한 조언을 하며 속으로 놀란다. 무척이나 안 지켜서 주치의와 남편을 실망시킨 주제에 남을 가르치려 들다니. 그들의 불안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자꾸 떠들게 된다. 오래전 학교 선생을 했던 버릇이 드러난다.

병원 다녀오는 길엔 나도 모르게 착해진다. 만나는 이들에게 관대하게 된다. 누가 좀 무례하다 할지라도, 저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 남모를 아픔이 있겠지 한다. 교통법규를 안 지키는 차를 만나도, 저 사람도 가족 중 환자가 있을지 몰라하며 너그러워진다. 연대감 같은 게 생겨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크게 아프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므로.

환자는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누구에게든 기대게 된다. 누군가에게 나를 맡기게 된다. 아프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하면 아파도 참고, 이제 다 끝났어요 하면 휴우 안도하고 미소 짓게 된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와 인사하고 나오면 맑은 하늘이 참 좋다. 다음 검진까지 또 살 수 있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처럼 가벼운 마음이 된다. 나는 약솜처럼 포근하고 하얘진다.

집에 와선 환자 돌보느라 지친 남편에게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이거 해줘 저거 해줘 늘 보채다가도 이 날만큼은 남편이 좋아하는 삼겹살도 굽는다. 한 시간 부엌에서 서성거리면 체력이 바닥나, 두 시간은 누워 쉰 후에나 밥상을 마주할 기력이 될망정 잠시 유순한 마누라가 되어 보는 것이다.

사랑이 떠나면 사랑이 보인다. 부모가 떠나면 부모가 보인다. 소중한 것들은 떠나면 그 소중함이 보인다. 건강을 잃으면 뒤늦게 알게 된다. 얼마나 건강이 소중한 것인지.

병원 다녀온 날엔 모든 생명이 귀하고 감사하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하다. 목숨 지키려면 잘 먹고 운동해야지 전의가 솟는다. 약한 나를 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병원 가는 날, 내 삶에 있는 그 장치가 감사하다. 완벽하지 않고 결핍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질 않던가. 골골 100년 계속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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