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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Sep 06. 2024

말의 총량

입의 십계명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 했지만 나는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육사 출신의 군인 시아버지는 늘 내게 작전 지시하듯 주의 사항을 전달하시곤 했다. 시아버지는 시정명령을 적어서 품에 간직하고 있다가 나를 만나면 그걸 꺼내어 읽으셨다. "제1은, 제2는, 제3은…"하고 읽으시는데 보통 7번까지 있었다. 그 내용은 "부드럽지 않다, 금방 '예'하지 않는다, 여성스럽지 않다" 등등이었는데 한마디로 하자면 ‘순종적이지 않다’로 요약할 수 있다.


종종 예상 밖의 엉뚱한 질문을 하셔서 나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셨다. 남편이 해외근무 나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위도가 몇이고 경도가 몇이냐 물으시면, 무척 더운 사막으로 낙타가 있다는 상식만 가진 나는 난감했다. 남편이 체류할 곳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며 못마땅해하셨다. 속으로 “내가 그곳에 폭탄을 투척할 일도 없건만 지형지물을 왜 알아야 하며 위도와 경도가 무슨 소용인가?” 하고 화가 났었다.


배우기보다는 남을 가르치려 드는 선생 출신의 며느리와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삼는 군인의 기싸움이 아니었을까.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요즈음 곰곰 돌아보니 요령부득의 미운 며느리였을 것이다. 그냥 립서비스라도 사근사근했더라면 시아버지와의 갈등 같은 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친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정아버지는 늘 내게 어려운 분이었지, 애교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친정엄마와도 최대의 밀월기간은 2주일 정도이고 그걸 넘기면 늘 다투고 만다. 아파서 한국에 오랜 기간 있을 때에도 즐거운 동거는 잠시뿐 오피스텔로 나와서 딴살림을 차리니 훨씬 숨쉬기가 수월했다.


혈육과의 동거가 어려운 것은 서로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늘 잘되라고 조언을 한다는 것이 잔소리처럼 들리고, 자식은 아직도 나를 못 미더워하는 부모인가 싶어 반발하다 보니 상충하는 것이다. 이럴 때 혈연이 아닌 사위나 며느리가 완충의 부드러운 역을 감당해야 집안이 화목하게 돌아갈 것인데, 지혜 있는 이가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다. 나는 유연하지 못해 그 역을 잘 소화해내지 못했다.


'정직'을 모토로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았다. 그러나 살다 보니 내가 하지 않은 말도 날개를 달고 다니며 사람 사이에 골을 만들기도 한다. 한 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사이가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걸 보면서, 입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기술이 필요함을 느낀다. 나의 언어는 치장이 없는 대신 부드럽다거나 상냥하진 않다. 전화도 '용건만 간단히'여서 상대방이 늘 묻는다. "바쁘세요?" 이메일도 무척 사무적이다. 오죽하면 오랜 친분의 나태주 시인이 기념문집을 내시는 데, 내 편지글을 책에 실으려니 너무 딱딱하다며 친절한 글 한 편을 다시 써 보내라고 하셨을까.


입술 근육을 좀 풀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날이 있다. 남들이 재미있다 하니 의무감에 실없는 말을 남발한 날. 마음 한구석 교만으로 날 선 혀를 감추지 못한 날. 내가 내뱉은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허풍을 보탠 날. 남의 말꼬리를 잡고 다언증이 도지는 날. 그런 날은 다언이 실언이 되고 만다. 집에 돌아오면 다 쏟아 부음에 마음이 허전하고 공기 속의 날아다니는 실수에 후회막급하다.


말의 총량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말을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말무덤에 묻거나 가슴에도 묻어야 할 말들이 있다.


인터넷에서 '입의 십계명'이라는 글을 만났다. 1. 희망을 주는 말 2. 용기를 주는 말 3. 사랑의 말 4. 칭찬의 말 5. 좋은 말 6. 진실된 말 7. 꿈을 심는 말 8. 부드러운 말 9. 화해의 말 10. 향기로운 말을 하라. 시아버지가 속주머니에서 꺼내어 나를 향해 읽으시던 것과 비슷해서 놀라웠다. 청맹과니를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신 시아버지의 뜻은 물거품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긍정의 언어로 토닥토닥 격려하고 쓰담쓰담 위로하며 나머지 생을 살아간다면 시아버님께 속죄가 될 것인가? 그러게 깨달음은 늘 뒤늦게 온다.


이정아/수필가

#USmetronews#이달의수필#2024년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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