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에 돌아보는

씩씩한 내 어머니

by 이정아

씩씩한 내 어머니
이정아

어머니는 머리가 좋았다. ‘연희동 암산왕’ 이라고 불리며 여러개의 ‘계’를 운영하셨다. ‘계주’노릇을 하며 몇 명이 모이든간에, 1번은 얼마 2번은 얼마의 불입금을 내야 하는 걸 달달 외우고 있었다. 계산기가 없던 시절 어머니가 컴퓨터처럼 장부를 통째로 외우면 모두들 놀라곤 하였다. 시인이며 신문기자인 아버지는 그저 술만 좋아하고 경제력은 별로였던데 반해 어머니는 활달하며 통이컸다. 우리집에는 어머니의 동창과 계원들이 많이 드나 들었다. 그 중엔 이웃해서 살다가 후에 영부인이 되신 분도 계셨다. 어머니는 자랑처럼 말씀하시곤 한다. “이XX여사가 내 계원 이었다.” 어머니의 생활력 덕에 가난한 시인을 아버지로 둔 우리 네 남매가 대학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는 신문사주택의 너른 마당에 닭도 치시고 하숙도 치셨다. 30여수의 닭은 아버지의 시인친구들이 오시면 안주용으로 잡았고, 연세 대학에 다니는 두 대학생이 우리집에 하숙을 하였다. 창문 앞에 진달래가 있던 우리집을 그리워하며 하숙생이 쓴 글이 연세춘추에 실렸었다고 지금도 이야기하신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역을 감당하느라 건넌방을 부지런히 오갔던 기억이 난다.

오래전 성악을 공부하시고 합창단의 멤버였던 어머니는,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과 ‘비목’을 작곡한 고인이 되신 장일남 선생과 친구이시다. 젊은 시절 같은 합창단원으로 친한 사이였다고 들었다. 합창단 안에서 서로 연애하고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그 연애담을 엊그제 일처럼 낱낱이 기억하시며 실감나게 이야기 하실 땐, 나도 덩달아 마음이 울렁거리곤 했다. 아무리 씩씩한 엄마여도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인 모양이다. 지금도 유명한 클래식이나 성악곡은 다 알아들으시고 원어로도 부르신다. 노인합창단에서 솔로이스트로 활약을 하신다. 엄마는 목청도 크고 목소리도 고왔다. 내 연애 상대는 젊은 목소리에 속아, 전화로 우리어머니께 사랑고백을 한 사람도 있다. 어머니는 모른 체하며 그 고백을 끝까지 다 들으실 정도로 재미있는 분이기도 하다.


말 수가 적은 아버지가 집에서 글을 쓸 땐 더 예민하고 신경질 적이 된다. 아버지는 늘 어렵기만 했다. 어머니는 하하호호 잘도 웃으시고 잘못하면 매질도 호되게 했지만 우리와 친했다. 아버지 몰래 역성도 들어주고 아버지께 감출 것은 감춰주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친구같았다. 대신 다른집 엄마들처럼 자식을 위한 희생 이런것은 없었다. 간식도 아이들 넷에 엄마 몫까지 늘 5등분을 했다. 딴 엄마들에 비해 엄마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사춘기때 동생들과 성토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사시는 지금도 매우 씩씩하시고 독립적이시다.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을 쓰셔서 속이 상한다. 많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계시면서 때마다 작은인심을 쓰시는 어머니는 그 재미로 사신다고한다. 얼마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많이 기운이 떨어지셨다.

지난 추석에 아픈 노모를 뵈러 가려고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어머니가 전화 하셔서 극구 말리신다. 신종 플루가 가장 극성일 때라며 제발 오지말라신다. 암에 걸린 어머니는 자식의 몸살을 걱정 하신다. 돌아보니 나는 어머니 닮은 엄마도 못되고 자식다운 자식도 못 되었다. 젊을 땐 닮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였는데 이제보니 배울 게 많은 어머니셨다.

씩씩한 어머니도 고민이 있으면 하나님께 매달리셨다. 잠결에 들리는 엄마의 기도소리에 깨면, 자는 척하며 기도를 엿듣기도 하였다.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기도를 하셨던 어머니는 지금도 멀리사는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빼놓지 않으신다. 이제껏 산 것이 어머니의 기도덕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살며 근심끼치는 것으로 나는 이미 불효를 하고있는 셈이다.


한국수필가협회 공동문집 '엄마바보' /2010년 3월 선우미디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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