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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기다린다.
비오는 창문 너머 급하게 도로를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5년전 미국에서 생활할 때 또래를 키우던 같은 아파트 살던 엄마다. 그녀는 낯선 외국에서 아이들 학교, 한국 마켓, 커뮤니티 모임 등 여러면에서 정착을 도와준 존재다.
비를 맞을까봐 두려웠던지 가슴에 품고 있던 루이 ** 가방을 감싸 안은 채 내려놓으며 앞 자리에 앉는다.
진주가 화려하게 박힌 샤* 귀걸이가 찰랑 찰랑거린다. 그때 모습 그대로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교 정문 앞에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화장끼 하나없는 외국 엄마들 속에 유난히 화장이 진하고 명품 가방을 든 한국 엄마들이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낯뜨거웠다.
( 일본 엄마는 엄두에도 못낼 직접 짠 니팅가방을 단체로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였다. )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명품을 산다는 것은 소비의 취향이지 그것이 그르다 판단할 문제는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이 40이면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며 마치 명품이 인생의 성공을 대변해주는 것 같이 말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거북하게 느끼게 된다.
외제차, 어느 아파트 몇 평, 직업의 레벨로 성공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학시절, 의사인 언니의 노력으로 의사들과 몇 번의 소개팅을 했다.
그들과의 만남은 항상 불편했다. 옷과 몸매를 대놓고 훑는 시선이 거북했다. 두세번 만나면 부모님의 직업을 묻곤 했다. 같은 의사거나 이쁘거나 그것도 아님 병원을 차려줄 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언니는 퇴근 후 음악을 틀어놓고 선배에게 혼난 마음을 서럽게 울며 달랬다. 밤마다 의학 용어를 중얼거리며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이 멋졌지만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지 알았기에 직업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그래서 언니가 애써 만든 소개팅 건수를 몰래 다른 친구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한 친구는 결혼에 성공하여 감사의 뜻으로 비싼 정장을 해줬고 매년 연락을 준다. “잘 살지?”라는 물음에 친구는 잠시 머뭇거리다 “잘 살지.” 대답한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부름에 꼬박꼬박 시댁으로 향해야 하고 음주를 즐기는 남편의 늦은 귀가에 문 한번 걸어 잠그지 못하고 산다. 물론 넓은 아파트에 외제차를 몰고 살지만 말이다.
남편을 만났을 때 그는 당시 핫 아이템이였던 이스트백을 매긴했지만 촌스럽기 그지없는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바지 밑단이 높이가 맞지 않고 쭈글쭈글 했는데 좀 친해지자 시접처리가 왜 그러냐고 물어 봤다. 그는 연로하신 할머니가 하나뿐인 손자의 ( 그것도 귀한 장손이라고 왜 밝히진 않았는지 의도가 궁금하다. ) 긴 바지를 잘라서 직접 만들어 주신거라 그냥 입고 다닌다고 말했다. 읽지도 않는 타임지를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남자애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였다.
어느날, 시골 부모님 댁으로 내려간 그가 이른 아침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하다 갑자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시집은 커녕 집에서는 활자라곤읽지 않는 지금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빵 ~웃음이 터졌다. 때마침 새벽을 깨우는 매미와 작은 새들의 상쾌한 울음소리가 저음의 목소리와 꽤 잘 어울리는 백그라운드 음악처럼 깔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멋있든지.
그런데 그때 꼬꼬댁~ 하는 닭 울음 소리가 났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닭을 키워? 그는 집에서 키우는 닭이 몇 마리이며 열매가 열린 마당에 있는 나무들을 마치 공원의 숲 해설사처럼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순간 머리속으로 이것 저것 생각이 많아지긴 했다. 내가 자라온 환경과는 사뭇 다랐다.
하지만 그는 순수했고 당당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남편은 종종 나에게 물어본다.
샤넬백? 신학기를 맞아 반 모임에 엄마들이 하나씩 들고 나올 장면이 그려진다. 그럴 때마다 우스개 소리로 대답해본다.
하지만 에코백을 매고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곳이 외국이 아니라 촌스러운 침구가 준비된 동해 펜션이라도 좋다.
그리고 장거리 운전이 피곤하기 때문이지만 돌아온 가족을 맞아주는 집이 좋다.
"역시 우리집이 최고야."
남편과 아이들은 벌러덩 거실에 누워 뒹굴거린다.
그들만으로도 꽉 찬 거실을 바라보면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