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판은 끝났다: 한식 연대의 시작

by 손정수

남의 판은 끝났다: 한식 연대의 시작

상파울루의 한인 이민 역사는 늘 도시의 가장 치열한 산업 한복판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편한 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돈이 돌고, 일이 있고,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움직였다. 그게 우리의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지는 애초에 제한적이었다.


상파울루를 크게 나눠보자. 북부는 산업 기반이 부족하고, 동부는 전통적인 노동자 거주지라 사업 확장이 어렵다. 서부는 옛 공장 지대로 여전히 개발이 더디다. 결국 남은 건 센트로(Centro)와 남부뿐이다. 사람이 몰리고 돈이 도는 곳은 남쪽이다.


오늘은 한인 경제의 두 축인 브라스(Brás)와 봉헤찌로(Bom Retiro), 그리고 일본인 거리 리벨다지(Liberdade)의 역사를 짚어보며,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나아갈 길을 이야기하려 한다.



브라스(Brás): 18세기 농장에서 박리다매의 전장으로


브라스(Brás)라는 이름은 18세기 이 땅의 주인이었던 포르투갈인 '조제 브라스(José Brás)'에서 유래했다. 원래 이곳은 부유층의 별장과 농장(Chácara)이 있던 한적한 곳이었다.

판이 뒤집힌 건 19세기 말, 커피와 설탕을 나르는 철도가 놓이면서부터다. 철길을 따라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공장 지대를 형성했고, 이후 시리아와 레바논 출신 이민자들이 정착하며 진스(Jeans) 계열을 중심으로 저가 의류 시장을 키웠다.


1980년대, 한인들은 이 역사 깊은 공업 지대에 짐을 풀었다. 이미 거대한 의류 산업이 돌아가던 곳이었고, 우리는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이곳의 성격은 명확하다. 바로 대용량 제조'다. 특히 티셔츠(Camiseta) 같은 기본 의류를 연간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 장씩 찍어낸다.

문제는 수익 구조다.


시리아와 레바논 상인들이 닦아놓은 저가 시장 위에서 전형적인 박리다매로 돌아간다. 뼈 빠지게 만들어 팔아도 매출 규모에 비해 손에 쥐는 순이익은 턱없이 적다. 브라스는 거대한 물류의 흐름은 있지만,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지역이다.



봉헤찌로(Bom Retiro): 유대인이 닦고 한인이 걷다


브라스가 '공장'이라면, 봉헤찌로는 '쇼룸'이다. 봉헤찌로(Bom Retiro). 포르투갈어로 '좋은 휴식처'라는 뜻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왕실과 귀족들이 주말을 보내던 휴양지였다. 이곳이 상업지구로 변모한 건 1910년대 유대인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부터다. 동유럽 박해를 피해 온 그들은 특유의 상술로 이곳을 직물과 의류의 기지로 만들었다. 초기 이탈리아인을 시작으로 그리스인을 거쳐, 1960년대에 이르러 봉헤찌로는 이미 상파울루 패션의 심장이었다.


브라스에서 '양'으로 승부하던 한인들은 1980~90년대 의류 호황기를 거치며 유대인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저마진 구조를 탈피해 소위 '부띠끄(Boutique)'라 불리는 고급 여성 의류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대거 이동한 것이다. 하지만 봉헤찌로에는 치명적인 지정학적 약점이 있다.

지도를 펴놓고 보자. 센트로를 기준으로 약간 북쪽에 치우친 이곳은 진출입로가 묘하게 한정적이다. 게다가 바로 인근에는 상파울루 주 전체 치안을 책임지는 군경 총본부(Copom)가 버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찰 심장부가 코앞인데, 현금이 돈다는 소문 때문에 늘 강도와 절도의 타깃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인근 루즈(Luz) 역 주변은 '크라콜란지아(Cracolândia, 마약 소굴)'로 변해버려, 지역 이미지와 치안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리벨다지(Liberdade): 1975년, 죽음의 땅에서 문화의 성지로


그렇다면 일본인 거리, 리벨다지는 어떠한가? 이곳의 역사는 사실 꽤나 어둡다. 원래 이름은 '라르고 다 포르카(Largo da Forca, 교수형 광장)'. 도망친 노예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당시 도시 중심지였던 쎄(Sé) 광장의 진입로였기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위한 저렴한 숙박시설이 생겨났고 자연스레 외부인이 모이는 교두보가 되었다. 1910년대 이후 일본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곳이 '관광지'로 폭발한 기점은 1975년이다. 이때 시작된 '리벨다지 주말 장터(Feirinha da Liberdade)'가 아시아 문화를 파는 거대한 플랫폼이 되었다. 리벨다지의 가장 큰 강점은 '심리적 안전선'이다. 상파울루의 부(富)가 집중된 남부와 구도심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리벨다지에는 암묵적인 인식이 있다."리벨다지까지는 괜찮지만, 그 선을 넘어 북쪽(봉헤찌로 방향)으로 가면 위험하다." 이 차이 하나가 주말의 풍경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K-Food의 역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버나


여기서 뼈아픈 현실 하나를 직시해야 한다. 바로 '한식'의 현주소다. 주말마다 열리는 리벨다지 장터를 가보라. 웃긴 것은 그곳의 주인공 중 하나가 한식이라는 점이다. 한국식 핫도그, 회오리 감자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파는 사람이 한인일 때도 있지만, 브라질 사람이 파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소비자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TV 광고를 보자. 브라질 식품 대기업들이 '한국식 핫도그'를 냉동 제품으로 내놓고 판다. 마트 냉동 코너에 우리 음식이 깔려 있다. 인기가 정말 많다. 내가 "한식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봉헤찌로를 먹거리 타운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우리가 그 10년을 흘려보내는 동안, 브라질 사람들은 한국을 철저하게 학습했다. 자본과 기술로 우리 문화를 '그들의 상품'으로 팔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지리적 고립'과 '경제적 고립', 이중고에 빠졌다.



연대의 시작: 브라질-한국 가스트로노미아 연대


그래서 우리는 뭉쳤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손을 잡았다. 지난 12월, '브라질-한국 가스트로노미아 연대'가 출범했다. 거창한 규모?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주말마다 장터에 나가 땀 흘리며 우리 맛을 알리는 순수 한인 상인들이 뜻을 모은 것이다.


그동안은 서로 쉬쉬했다. 다들 선수니까,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며 힘든 내색 없이 대충 넘어갔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한두 가지 힘든 게 아니었다. 주말 장사를 위해 질 좋은 재료를 사 와야 하고, 사람을 모아야 한다. 행사 전날이면 산더미 같은 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당일에는 새벽별 보고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 찜통더위, 살을 에는 추위, 그 모든 악조건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몸만 힘든 게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세상이다. 복잡한 행정 절차, 위생 안전 규칙을 배우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한다. 가장 서러운 건, 브라질 행사 주최 측의 텃세에 밀려나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 하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어려움을 모두 나누고,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기 위해 이번에 연대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면 부러지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 모이면 버틸 수 있다.



이제 시작이다


이제 막 첫발을 뗐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냉정하게 말해 리벨다지는 문화가 흐르고, 봉헤찌로는 고립되어 있다. 이 구조적 한계를 깨기 위해선 우리만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브라질 대기업의 냉동식품이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우리만의 맛과 정성 말이다.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일, 이제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 시작한다. 남이 만들어놓은 판에서 구경만 하던 시대는 끝났다. 우리가 왜 이곳 상파울루에 있어야 하는지, 우리의 땀으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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