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깊이에의 끝없는 이야기
시선 #2
가히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화려하다는 단어가 모자랄 정도로 놀라운 아이디어와 쉴 틈 없는 화면전환으로 메디아의 이야기를 지루할 틈 없이 누렸다. 오래된 비극의 신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정신없이 무대를 즐기다 보니 막이 내린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눈앞에 펼쳐지던 마법은 온데간데없고 무대에는 접근을 막는 폴리스라인만이 남는다.
공연장을 떠나는 와중에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 속 몇몇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고대 그리스 신화로부터 멀어져 현대의 매스미디어 및 정신없이 흘러가는 소비사회에 익숙해진 오늘의 현실’, ‘반성 없는 웃음과 흥미’, ‘죄책감도 슬픔도 없이 그 모든 것들을 방조하도록 한다.’
겁이 났다. 조금 전까지 마법 같은 이야기를 웃고 즐기던 나의 행태를 검열한다. 과연 나는 잘못된 방식으로 가벼이 자극을 소비한 문제의 관객이었을까?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는 21세기 현대인이라면 매일 접할 미디어들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기원전 상황을 재해석해 묘사된 게임, 인터넷방송, 드라마, 토크쇼 등등… 이 미디어들은 어느새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방식들이고, 이미 그 자체로 너무나도 친근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가벼운 소비’, ‘지나친 자극’ 등의 사회적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눈을 감고 다시 공연장 안을 떠올린다. 폴리스라인을 넘어 무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리곤 현란했던 장면 하나하나를 되짚어 본다.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기원전 인물인 메디아는 21세기의 이들에게 각 상황이 가장 잘 와닿을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 방식을 수행하기 위해, 무대 위에 서 있는 이들은 매 장면마다 바쁘게 무대의 분위기를 전환한다. 조금 전 우악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다가도 미디어 변화를 알리는 정적이 찾아오면 메데이아, 이아손 등은 ‘배우’라는 직업인으로 돌아와 무표정하게 의상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현란한 장면을 꾸몄던 소품들을 바쁘게 치워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빠르고 가벼운 소비’라는 단어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 모순의 반복을 곱씹다 보니 이제야 좀 알 것도 같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소비사회’를 구성하는 것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받아들일지는 각각의 시대 향유인들이 결정할 수 있다. 즉, 매스(mass) 미디어들 속에서 어떻게 그 수많은 정보 중 일부를 수용할 것 인지, 그리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들에 대해서는 각각 어느 정도 깊이까지 파고들지에 대해서는 각자에게 결정권이 이미 주어져 있다.
다시 폴리스라인 밖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기보단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꼬리의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져본다. 가볍고, 빠르고, 정신없던 자극 속에서 무엇이 그렇게 좋아 환희를 느꼈었는지, 메디아의 잔혹사가 슬픔 없이 전달된 게 혹시 화자 메디아의 바람이었는지. 가벼운 질문들이 이어지고 쌓이며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 낸다.
막은 내렸지만 나에게 극은 끝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받아들인 가볍지만 밀도 높은 마법들을 찬찬히 다시 음미하고, 조합하고, 재해석하며 끝없는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 한다.
이이륙 작가 씀 (instagram@e26_for_w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