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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초 Feb 01. 2024

이제 이 정도는 알지 않으세요?

12년 후배가 사수일 때 생기는 일

10년 만에 복직하니 사무실엔 새로운 얼굴들 뿐이었다. 내 사수님은 9년 차, 12년 차 미혼 여성분들. 처음엔 젊은 여성분들에게 배우는 게, 나이 든 남성 선배님들보다 낫겠지, 안이하게 생각했다. 후배에게 묻는 게 더 치졸하고 부끄러운 일인진 생각도 못했다.  

 

휴직기간 동안 마우스를 잡아본 일이 없었던 내가, pc 두 대를 컨트롤 두 번 누르고 엔터 눌러서 업무용과 인터넷용으로 번갈아가며 바꾸는 것도 몰랐고 몇 년 전, 대대적인 전산작업으로 업무용 화면이 싹 바뀐 것도 몰랐다. 업무 매뉴얼은커녕 규정도 숙지하기 전에 민원전화는 쏟아지고 전화를 받아도 아는 게 없으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대리님,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해요?"

한 두 건이지, 매번 이렇게 물으니, 대리도 답답했을 터. 처음엔 잘 알려주다가, 똑같은 걸 3번째 물었을 땐,

 -제가 지금 똑같은 말 세 번했거든요? 지난번에도 물어보셨고, 며칠 전에도 물어보셨어요! 전 이제 그만 말할래요!!"


사무실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내지르는 한 마디는 내 가슴에 콕 박혔다. 무안함과 동시에 무능함에 대한 자책. 세 번이나 말해줬다는데 왜 난 이해가 안 돼서 또 묻고 있는 걸까.




대리님들께 서류철을 가져가서 물을 때면 내 자세도 어정쩡했다. 다리를 꿇고 물어보면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나는 절박했다. 어쩔 땐 허리를 굽히고 서류를 들고 물어보기도 하고.

매번 후배들에게 내 자리로 와서 가르쳐달라고 할 수 없으니, 아쉬운 내가 대리님들 자리로 가서 굽신거리며 하나라도 배우려고 했다.




 내가 출근해서 일하고 있으면 대리님들이 차례로 출근하는데, 출근하자마자 물어보면


 - 과장님! 저 pc부터 켜고요!!!

- 과장님! 저 아침 좀 먹고 물어보심 안될까요??(그러고 보니 입 안 가득 삶은 계란을 물고 있다...)




미안해서 점심이라도 사주려고 하면

-저 운동예약해 둬서 오늘은 곤란하고 다음에 약속 잡죠. 커피 자주 사주시잖아요, 점심은 다음에 먹어요




일찍 퇴근하는 나에게, 야근하며 메일로 내 업무를 설명해 준 대리에게

" 대리님, 이렇게 차근히 적어주시니 정말 좋네요. 뭘 해야 할지도 알겠고. 감사해요"

- 그거 다 원래 과장님이 알아서 하셔야 하는 거예요.



엑셀 자료로 vlookup 돌리는 법을 물으니,

-엑셀 공부 좀 하셔야겠어요


엑셀 함수 뭐 써서 자료 뽑았냐, 아님 수기로 한 건 한 건씩 입력한 거냐 물었더니,

- 그건 과장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돈만 입금하고 서류는 안 보냈는데, 업무 매뉴얼에는 이런 경우가 없는데 어떻게 처리하냐고 물으니,

- 이제 이 정도는 알지 않으세요? 그건 담당자가 알아서 판단해야지, 이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점심시간에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나쁜 년 하고 되뇌어봐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끈한 물줄기는 멈출 줄 몰랐던 날들이

가물 가물해지는 요즈음,


다시 기억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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