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커피 프린세스

프린세스는 못 얻고 커피만 얻었다

by jobsori

과거에 수입 없이 약 1년가량 쉰 적이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회사를 준비했던 시간. 예상은 했지만, 예상했던 기간보다 쉬는 기간은 길어졌다.


다행히 생계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수입 없이 살게 될 나날들을 대비해, 그 직전에 받은 성과급을 한 푼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가슴속에 화가 가득했다. 그래서 다음 회사로 갈아탈 준비를 차분히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마치 퇴근길 9호선 환승역에서 급행열차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내가 바라는 급행열차, 그러니까 새로운 회사에는 날 받아줄 공간이 없고, 난 얼른 집에 가고 싶고, 이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고. 그런 기분이 들었을 때. 그때부터 퇴직 D-day를 세기 시작했다. 물론, 차분하지 못했던 나는 퇴직 D-day를 다 세기도 전에 퇴사한다고 통보를 했다.


어찌 됐든 간에, 구 직장을 퇴사하기 직전에 받은 성과급은 수입이 없는 기간 동안 생활비로 요긴하게 쓰였고, 통장에서 잠깐 동안 자리했던 그 친구들의 흔적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년가량의 벌이 없는 백수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게 있다. 나는 돈을 좋아한다. 백만장자가 될 수는 없더라도, 티끌 모아 더 큰 티끌을 버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티끌들이 모인 통장이 좋았고, 조금씩 쌓여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행복을 느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통장 잔고는 조금씩 늘긴 했어도 줄어든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1년 동안에는 잔고가 야금야금 줄어갔다. 내가 야금야금 썼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돈벌이를 시작한 곳이 지금의 회사인데.. 다시 퇴사를 바라는 삶이 되었다. 반백 개의 지원서를 써 내려가면서 '당분간은 채용 공고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지'라고 다짐을 했던 나인데, 이런 내게 퇴사 의지를 불태워주는 이곳도 어지간한 곳인 것 같다.


이 회사가 몹쓸 곳인 곳도 맞고, 내가 이곳을 못 버티는 유약한 존재인 것도 맞다만, 더 이상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꼴은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참지 못하고 퇴사를 울부짖고 난 후에, 밥벌이는 하고 살 수 있도록, 생계형 파트타이머를 위한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준비의 시작은 바리스타 자격증 준비였다. 회사에서도 재미를 찾아 헤매는 내가 어디 가겠나. 살기 위해 준비하는 파트타이머이더라도, 과거에 내가 즐겁게 일했던 걸 다시 하고 싶었다.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으려고? 학교에 다닐 적에 짧지만 적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는데, 그중 즐겁게 했던 것이 카페에서 일한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도 내리고, 커피도 마시고(?).


카페 아르바이트에 바리스타 자격증이 필수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약 10년 전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던 '나이 찬' 사람이 아르바이트 면접에 통과하려면 바리스타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하고 있는 직무의 경력 시장에서나 내가 팔리지, 카페 아르바이트 시장에 내가 팔리겠냐고. 무엇보다 스팀 내리는 법을 다시 한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자격증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을 여러 협회에서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왕이면 가장 큰 협회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보자 싶어, 한국커피협회에서 주관하는 바리스타 2급을 준비하기로 했다.


보통 바리스타 자격증은 국비 지원을 통한 내일 배움 카드로 많이 준비한다. 나는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해당되지 않았기에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코스로 준비했지만, 지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무엇이든 받는 것이 이득인 것 같다.


필기는 기초 이론과 모의고사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 문제집을 구매하여 혼자 준비했다. 필기시험 보기 약 한 달 전부터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본업과 개인적인 일정 및 건강 이슈로 중간에 공부를 놓았고, 시험 보기 직전에 벼락치기로 허겁지겁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다행히 1차 시도에 합격을 했다.


실기는 혼자 할 수 없어 회사 근처의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쉬고 싶었고, 평일에 출근하기 위해 외출한 김에(?) 학원을 다니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 두 군데 알아봤다. 한 곳은 회사 코 앞에 있었고, 1:1 수업이 가능했으나 시험장을 운영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른 한 곳은 회사에서 좀 떨어져 있고, 그룹 수업으로 진행하지만 시험장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바리스타 실기 학원 중 시험장을 운영하는 경우, 내가 배우고 연습한 곳에서 시험을 볼 수 있기에 당황하고 실수할 확률이 적어진다. 나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회사 코 앞에 있는 곳을 선택했다. 1:1 맞춤형이라 내가 시간 될 때 갈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인복이 좋은 건지, 선생님이 많은 노하우를 가르쳐주셨다. 시험을 접수할 때 근처의 좋은 시험장을 추천해 주셨고, 그 시험장에서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면 시험 전 연습도 가능하다는 내용도 가르쳐주셨다. 시험장을 운영하는 학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내가 응시할 시험장에서 미리 연습한 덕분에 당황하지 않고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미래를 위한 준비로 학원을 다니는 동안, 몸을 써가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한창 학원을 다닐 때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그 당시에 또 얼마나 회사에서 많은 싸움을 해왔던가. 체력 소모는 물론, 감정 소모도 엄청났다.


지겨운 싸움 끝에 그만두겠다고 소리친 적도 있었는데, 통보를 한 날이 마침 학원에 가는 날이었다. 수업을 취소할까도 싶었지만, 꾸역꾸역 갔던 날이었다. 저녁이라 커피를 벌컥벌컥 마실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그때 들리는 원두가 갈리는 소리와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스팀을 내린 후 에스프레소 위에 욱여넣는 귀여운 하트가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이 회사에서 겪은 힘든 것들을 잠깐 잊게 해 주었다. 그 순간은 '내가 회사는 그만두지만, 무엇이라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실기 시험을 보고 나서 약 한 달이 지난 후, 자격증이 왔다. 그 자격증은 어디에 있냐고? 책상 귀퉁이에 있는 책꽂이에 잘 모셔두었다. 자격증은 땄지만, 이 자격증이 빛을 발할 날이 올는지. 아직 한국커피협회 2급 바리스타의 실력을 뽐낼 기회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이 몹쓸 회사에 구질구질하게 '존버'하고 있는 중이어서 바리스타 실력 발휘의 시기는 좀 더 미뤄지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리며 돈을 버는 때가 온다면, 그때는 둘 중 하나의 상황일 것이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벼랑 끝에 서서 살 길을 궁리하고 있거나 회사와 아름답게 이별하고 날개를 단 채로 벼랑 끝에서 도움닫기를 하고 있거나. 후자이기를 바란다. 회사를 졸업하고 나만의 일을 찾으며 즐겁게 커피를 내리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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