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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범준 Jun 05. 2024

우울증

잠에 취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큰 파도에 한번 쓸려 모든 게 다 변한 듯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나무토막 하나를 부여잡고 어둡 고도, 끝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었다. 불안한 발밑을 가늠하고자 몸을 살짝 더 깊이 담구어 보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더 깊이 잠수해볼 용기는 추호도 없다. 물속에 고개를 넣고 바라보려 짠 바닷물 속에서 눈을 떠보지만 내 발끝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도 가늠할 수 없는 이 바다에 대체 내가 왜 이렇게 떠다니고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지만 하늘은 어둡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둥둥 떠다니거나, 도저히 육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목적지를 상상하며 발을 하루 온종일 구르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난 정말이지 미친 듯이 이 바다를 벗어나기 위해 발을 저어보았지만 내 주변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냥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바다와 그저 검은 하늘뿐이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난 끊임없이 이 상황을 벗어 나보려한다. 하지만 하루 이틀 나의 미친 듯 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은 너무나 잔인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의미 없다. 오히려 그냥 가만히 조류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겠다. 난 그저 멍하니 조류에 따라 몸을 맡겨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편한 느낌마저 든다. 어디론가 흘러가고는 있지만, 제자리를 맴도는 건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육지를 향하여 조금씩 흘러가는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난 흘러가고 있다. 어느 순간 이 어둠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고, 발밑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는 듯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조류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대로 나의 작은 나무토막과 함께 난 육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마저 가득해져 간다.

그 순간 어디선가 지금껏 듣지 못했던 엄청난 무게와 규모가 느껴지는 소리가 들리며, 큰 파도가 나를 덮쳤다. 안 그래도 잃고 있던 방향 감각은 물 위에 떠있던 느낌이 아닌 더욱더 큰 우주 한가운데 버려진 채 엄청난 에너지에 휩쓸려 더욱더 깊은 어둠으로 내던져지는 것 같은 혼돈을 느끼게 된다. 언제 놓쳤는지 그나마 내 몸을 의지해준 나무토막도 없이 난 깊고 깊은 바다로 빠져 들어갔다. 이제는 바닥이 어딘지 수면이 어딘지도 가늠할 수 없는 공간 속으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난 죽는구나. 생각하며 물속에서 숨을 쉬려고 버둥거려 본다. 이제 난 죽는구나, 이 모든 고통과 외로움과 결국 작별하는구나. 그래 오히려 이 죽음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이대로 내 몸은 결국 물고기 밥이 되겠구나 생각해 본다. 하루 이틀 지난 걸까 한 시간 두 시간 지난 걸까. 이상하게도 난 죽지 않는다. 숨을 쉴 수 있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 물속에서 , 코앞도 안 보이는 그 어두운 물속에서 이 몸의 생명은 붙어서 다시 어딘가를 향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주변에 잡히는 게 없는지 미친 듯이 허우적거려 보다가 어느 순간 지쳐서 내 온몸에 힘을 뺀 채 팔을 축 늘어뜨리고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려 마음을 다져본다. 어둡다. 차갑다. 아무것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다. 눈앞도 내 차가운 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그저 깊은 바다 속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자연스럽게 손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건 물의 감촉이 아니다. 미끄러운 물고기의 감촉이 아니다. 난 분명 사람의 온기를 느낀 것이다. 잊고 있던 내 온몸의 감촉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나긴 어둠 속에서 그저 죽음을 향해 내몰려 있던 난 너무나 극한의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나와 같이 떠다니다 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래 그도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손을 살며시 당겨 본다. 이건 분명 사람의 손이다. 손 이외에 사람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느껴진다. 몸과 마음이 느껴진다. 우린 물속을 허우적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따뜻한 손길과 가까이 다가와 존재를 알게 되며 서로 깊은 바닷속을 헤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에 대한 것들을 공유하고 나누어 본다. 우린 온몸으로 우리의 외로움과 황망함을 공유하고 나눈다. 이 깊은 황망함 속에서 우린 금세 서로의 존재가 전부가 되어 가고 있다. 난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았다. 함께 손잡고 헤엄치고 방향을 설정하고 우린 희망의 끈을 부여잡은 채 헤엄치고 있었다. 어둠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 희망을 함께 공유하고 헤엄치는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난 이 모든 어둠과 불행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린 서로 작은 것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손을 맞잡은 강도가 너무 쌔다 던 지, 때론 누구도 모르는 이 망망대해이지만 각자 원하는 방향이 달라 서로를 믿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린 둘 중 누군가가 양보하며 헤엄쳐 나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작은 의견 충돌에 서로 지치고 힘들어 부여잡은 손을 놓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시 행복감을 상기시키며, 부둥켜안아 보려 하지만 어느새 서로의 손아귀에는 점점 힘이, 마음이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놓아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어떤 작은 조류에 난 그 손을 놓치고 말았다. 놓치는 그 순간. 그동안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던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지난 시간 함께 헤엄쳐온 내가 너무나도 믿고 의지했던 그 사람의 눈을 마주친 순간, 다시 잡을 수 없는 그 손을 놓치는 순간 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각자의 심연의 바다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멀어질수록 서로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던 그 사람. 유일하게 나와 같은 온기로 이 망망대해를 헤엄칠 수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버렸다. 내 몸은 이 바다를 헤엄쳐 소진된 체력보다 그 손을 놓은 것에 대한 후회감에 더욱 지처가고 있다. 왜 그랬을까. 더 큰 목적지를 향해 가던 우리는 이 깊은 어둠도 무색해질 만큼 서로를 의지한 채 필요했던 우리는 대체 왜 그런 작은 감정 따위에 더 큰 불행을 초래했을까. 아니 난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작은 감각에 내몰려 이런 외로움의 우주에 다시 스스로 빠져 들어갔을까. 그저 어둠 속에 내몰린 채 아무런 희망도  없었어야 하는데, 난 그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그것이 존재하고 내가 느낄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말 았다. 이제 난 이 깊고 깊은 어둠 속을 다시 또 홀로 떠다녀야 했다.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발밑이 두려워지기 시작하고, 때로는 어느 커다란 생명체가 다가와 날 먹어 치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웅크린 채 그저 깊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다고만 생각하며 표류하고 있다.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물고기에게 뜯어 먹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이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 보다 그 고통이 오히려 덜할 테니. 난 차라리 조금씩 고통을 받더라도 조금이라도 일찍 내 표류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어떠한 물건도 만져지지 않는 깊은 바닷속을 끊임없이 조류에 따라 빨리 떠가기도 하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지, 깊이 있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래 역시 변하지 않는다. 희망할 수 없다. 바닷속은 바다 속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허우적허우적 죽음의 늪으로 들어가고 있다. 잠시 느꼈던 희망조차 내게는 다시금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을 명분만 주었을 뿐 그 어떤 개선도 남겨 주지 않았다. 그 어떤 달콤한 감각도, 기억도 모두 그저 헛된 자극일 뿐이다. 하지만 죽어지지 않는다. 그저 깊은 바다로 조금씩 가라앉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떠오르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저 내가 숨을 쉬는지도 아니면 이미 죽어버린지도 모를 이 시커먼 바닷속을 난 그저 표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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