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와 시대적 흐름으로 규정되는 악함에 대하여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읽으면서, 이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이 붕괴되는 지점을 정면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언명령이란 결국 단순한 요청이다. 네가 지금 하려는 행위를, 모든 인간이 해도 괜찮은 법칙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 그리고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윤리다. 이 명령은 외부의 법이나 명령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모두 밀어내고, 인간 스스로의 판단, 능력, 자율성을 마지막 보루로 세운다.
유대인의 대량 학살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 보루가 무너진 자리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실한 행정가였고, 효율적인 집행자였으며, 법과 명령에 충실한 공무원이었다고 생각한다(물론 그의 궤변일 수 있다 그가 저지른 것은 대량학살이었지만, 그가 수행한 것은 ‘업무’였다. 그는 판단하지 않았다. 판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변명이자, 동시에 그의 범죄였다.
‘악의 평범성’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 지점을 ‘사유의 부재’라고 불렀다. 악은 사악한 의도에서만 나오지 않으며, 깊은 증오나 광기에서도 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판단 없이, 자기 자리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악. 이것이 그녀가 말한 ‘평범성’이다. 그러나 이 결론을 곱씹다 보면 어딘가 불편해진다. 정말로 인간은 사유의 부제로 그런 거대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인가.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이성보다 훨씬 앞서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이 의지는 각자의 것이 아니다. 근원에서의 그것은 하나의 의지이며, 인간의 차이는 이 의지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서 갈린다. 의지를 끝까지 개인의 욕망과 생존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개체에게 세계는 분리된 타자들의 집합일 뿐이고, 그곳에서는 윤리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대로 의지가 모두에게 공통된 것임을, 타자의 고통이 결국 자기 자신의 현현임을 인식하는 인간에게서 연민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으로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에게 도덕은 결단이나 규칙이 아니라, 의지가 스스로를 알아보는 순간에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결국 본능적인 층위에서 발생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윤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간단한 실험을 통해 제도와 작은 심리적 장치의 차이만으로도 인간이 자신의 본능적 윤리 감각으로부터 얼마나 쉽게 분리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희생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숫자였고, 서류였고, 처리 대상이었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깨끗이 유지했기 때문에, 더 많은 죽음이 가능했다. 책임은 분산되었고, 판단은 상급으로 위임되었으며, 그는 그 사이를 흐르는 의지의 통로가 되었다.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의지의 한 현상이었고, 그 현상은 구조 속에서 증폭되고 결정되었다.
밀그램의 실험이 떠오른다. 권위자가 처벌을 명령할 때, 처벌 대상이 눈앞에 있으면 사람들은 주저한다. 그러나 다른 방에 있으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면, 처벌은 훨씬 가혹해진다. 이 실험은 인간의 본능적 윤리의식과 도덕성이 얼마나 제도와 심리적인 조건에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악은 본능적 인간의 문제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그거 처한 환경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히만은 밀그램의 실험을 실제 사건에서 보여준 가장 큰 사례 중 하나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의 결론은 어쩌면 다분히 이상주의적 일수 있겠다. 그녀는 대부분의 인간이 여전히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최소한 멈춰서 판단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어쩌면 칸트는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알기 때문에 정언명령을 통해 본능의 층위에 윤리의식을 규정해 두었는지 모르겠고,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그 기대 자체를 위험하다고 바라본 것 일수도 있겠다. 특정한 인간들은 사유하지 않아도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오히려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합의는 어쩌면 밀그램의 실험을 통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 의식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환경, 그리고 시대적 조건의 흐름 속에서 규정되고 변화된다고 말이다.
악을 개인의 악의로만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안도하게 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특별히 나빴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특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그에게 권력과 제도는 충분히 그의 악함을 합리화해주는 ’ 특별한 ‘장치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악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기보다, 판단하지 않아도 되게 설계된 세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사유는 요구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이때 사유하라는 한나 아렌트의 요청은 다분히 이상주의 적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사유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또 다른 아돌프 아이히만이 될 준비를 마친 셈이다. 그리고 그 준비는, 놀랍도록 평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