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라는 허상에 대하여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인간의 가장 사적인 고백처럼 다루어져 왔다. 사랑의 부재, 관계의 실패, 혹은 사회적 고립의 결과로 설명되며, 그것은 대개 개인의 성격이나 환경 탓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이 그렇게 단순한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로움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때, 혹은 세계를 해석할 언어를 잃었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철학적 증상에 가깝다.
알베르 카뮈의 인간을 떠올리면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란, 세계는 의미를 주지 않고, 인간은 그 의미를 요구하는, 둘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그는 인간의 삶이 느끼는 이 외로움과 허망함에 대한 사유를 부조리함이라는 벽으로 도망가버린다. 신에게도, 초월적 의미에도, 완성된 목적에도 그저 기대지 말라고 만 한다. 그는 그저 이 부조리를 의식한 채 살아가라고 말한다. 카뮈의 인간은 끝내 그 벽 앞에서 혼자가 된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지도, 세계와 화해하지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깨어 있는 채로 견딘다. 이 의식은 명료하지만, 동시에 잔혹하다. 연결을 낳지 못하는 명료함은 인간을 더욱 고립시킨다. 그래서 카뮈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그의 철학에서 외로움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상주하는 상태다.
하지만 염세주의에 고독했을 것 같은 쇼펜하우어의 인간은 외롭지 않다. 그것은 역설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절망을 훨씬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 철학자다.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의 발현이며,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진동한다. 행복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고, 만족은 잠깐의 착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냉혹한 진단은 인간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개인의 고통을 세계의 구조 속에 정확히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은 나만의 실패가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나는 혼자인 존재가 아니라, 같은 법칙 아래 놓인 수많은 현상 중 하나다. 이 인식은 위로가 아니라 해부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을 제거한다. 이해는 공감을 대신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라 거대한 운동의 일부가 된다.
니체에게 이르면 외로움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니체는 위험한 철학자다. 그의 문장은 도덕을 무너뜨리고, 그의 사유는 인간을 불안정한 지점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이상하게도 명쾌하다. 그는 고통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견디고, 디뎌내고, 그로부터 힘을 길어 올리라고 요구한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자신의 리듬으로 만들라고 한다. 니체의 인간은 외로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외로움을 에너지의 부족 상태로 해석한다. 외로움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자기 생성의 실패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 가며, 그 과정에서 고독을 생산성으로 전환한다.
인간의 외로움이란 결국 개인의 철학 부재에서 비롯된다. 세계를 해석할 언어가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역할과 비교, 그리고 반사된 이미지밖에 없다. 그 속에서 인간은 ‘내가 없다’는 감각을 경험하고, 그것을 외로움이라고 부른다. 이는 본질적인 감정이라기보다, 방향을 잃은 의식이 만들어낸 속임수에 가깝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세계를 보려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스스로의 내면의 벽과 묵묵부답인 세상을 보려 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응시하게 된다. 세상의 벽을 직면할 용기가 없을수록,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그 확인은 언제나 실패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결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실패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다.
반대로 부조리의 벽을 당당히 바라보고,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고통과 권태의 진자 운동 속에 놓인 하나의 시계추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때 삶은 더 이상 개인적인 실패의 연속이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의 운동이 된다. 그리고 이 이해의 순간, 인간은 외로움을 생각할 틈조차 없이 자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원함’들에 붙들리게 된다.
이 ‘원함’은 허영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인정이나 비교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 안에 놓인 나의 위치를 인식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운동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가. 이 질문이 생겨나는 순간, 외로움은 더 이상 감정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유가 멈췄을 때만 나타나는 공백이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외로움은 극복해야 할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 혹은 이해를 회피한 상태를 알리는 신호에 가깝다. 철학은 외로움을 없애주지 않는다. 대신 외로움이 생겨날 자리를 사유로 채운다. 그리고 그 사유가 충분히 깊어질 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타인과 함께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세계 한가운데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