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를 회피한 삶의 끝에서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by 조범준

이반 일리치는 누구보다 평범했고, 누구보다 사회적이었으며, 누구보다 ‘잘’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의 삶에는 결격사유가 없었다. 출세했고, 결혼했고, 체면을 지켰으며, 불필요한 감정은 삶에서 제거했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정확히 수행해냈다. 톨스토이는 이 인물을 통해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하게 성공한 인간을 우리 앞에 세운다.

알베르 카뮈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반 일리치의 삶은 철저히 철학적 자살의 형식을 띤다. 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마주하기보다, 그는 사회가 제공하는 의미—직위, 존경, 안정, 타인의 평가—를 자신의 삶의 목적처럼 받아들인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살지 않는다. 대신 ‘삶이 요구하는 포즈’를 정확히 연기한다. 그 연기는 너무 완벽해서, 그 자신조차 의심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부조리를 살면서 마주하지 않는다. 죽음이 가까워질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환원하고, 행정적 오류처럼 처리하려 한다.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신호를 끝까지 오해한다. 그러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순간에야,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혹시, 내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질문은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순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삶이 더 이상 설명되지 않고, 정당화되지 않으며, 이전의 모든 의미가 무너지는 순간. 그러나 이반 일리치에게 이 자각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 그는 진실을 보았지만, 그 진실을 살아낼 시간은 이미 사라진 뒤다. 톨스토이는 이 잔인한 지연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핵심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철저히 고립된 한 인간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다. 가족은 그의 고통을 번거로워하고, 동료들은 그의 빈 자리를 계산하며, 의사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기능으로만 취급된다. 오직 아무런 인적 관계가 없던 하인 게라심만이 그를 한 인간으로 대한다. 이 대비는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평생 사회적 관계 속에 있었지만, 실존적으로는 단 한 번도 관계 맺지 못했다.


카뮈라면 이 순간 이후에도 살아남아 부조리에 반항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다르다. 그는 말한다. 부조리를 너무 늦게 인식한 삶은, 그 인식 자체가 이미 형벌이라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구원의 서사가 아니라, 회한의 서사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짧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죽음보다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가. 톨스토이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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