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에서 살아남기 - #2
H 와는 재작년부터 교제하기 시작했다. H를 만나며 경험한 그녀의 멋진 면들에 나는 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씩이나 하게 되었고, 평생을 같이 살며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각오로 1달 동안 기도와 QT를 하고 난 후, 확신을 가지고 어느 햇살 좋은 오후에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도 좋다며 승낙해 주었다.
당시 난 F-1 OPT로 일 하며 영주권 마지막 스텝에 이르러있었는데, 그 마지막 절차가 얼마나 길어질지 몰랐기에 더 이상 status 체크를 안 하고 있었고, H 와도 일단 영주권이 나오면 결혼식을 본격적으로 준비해 나가자고 얘기를 했다. 그렇게 내 딴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하루는 장모님과 영통을 했는데, 장모님이 "얼굴을 제대로 보고 결혼 얘기를 하면 한결 마음이 편하겠다"는 얘기를 하시자 말자 우린 바로 영주권 발급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ㅋㅋ. 그렇게 기도하고 일주일 정도 뒤, 정말 오랜만에 USCIS 체크를 했더니 영주권이 발급이 되었다고 나와있었다..!
영주권 발급 이후 결혼식 계획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하는 식이기에 웨딩 플래너님을 끼고 계획을 했는데, 너무나도 친절한 플래너님의 도움으로 웨딩 날짜, 드레스투어등 모든 부분들에 있어서 순차적으로 매끄럽게 잘 진행되었다. 모든 계획은 H가 주도적으로 하였고, 나는 옆에서 필요에 따라 성의 있게 추천을 해주는 정도..? 로도 충분해 보였다.
또 바로 양가 부모님들 뵈러 한국도 다녀오게 되었다. 그 사이에는 상견례도 하려고 날짜를 잡았는데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일정에만 전념하고자 휴가를 내고 다녀오기로 했다 (H는 한국에서도 일했다 ㅜㅜ).
상견례 당일 새벽, 긴장을 했는지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새벽에 계속해서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다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아침 5시쯤, 한국에서 처음으로 회사 Slack 메신저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메시지가 많이 온 것을 봤는데 나와 예전에 같이 일하던 PM (서비스 기획자)의 개인 DM 이 와있는 걸 봤다. 채널들은 분명 일 관련 메시지들일 텐데, PM 개인 메시지는 뭐지..? 하는 생각에 그 메시지 먼저 확인하였다.
"I'm sorry for the news, J. Let me know if there's anything I could do to help"
(= "J 야 유감이야.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줘.")
나는 눈도 잘 안 떠지는 그런 상태였지만 머리만큼은 놀라울 만큼 차가워져 있었고 이 문장을 읽자마자 이건 분명 해고와 관련 있는 메시지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 때는 mass tech layoff 들이 있기 전이었다). 나는 다른 것보다 이 해고가 랜덤 한 해고인지 아니면 실적과 관련된 해고였는지 궁금했다. 다른 채널들을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는 와중 내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번 해고는 실적과 무관한 해고이기를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실적과 관련 있던 없던 해고는 해고일 뿐이라고 얘기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나의 상황은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미래의 배우자에게, 또한 배우자의 가족들에게, 내가 실적이 좋지 않아 해고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상견례 자리와 양가 가족들을 만나보는 자리에서 사위로 오려는 남자가 벌써부터 자신감도 없어 보이고 능력도 없어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H에게도 나와 살아가는 세상은 평안하며 안정적일 거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좀 더 알아보니 "다행히 (...)" 큰 정리해고였고, 나뿐만이 아니라 San Francisco 오피스에 근무하던 모든 부서장부터, CTO, VPs, 말단 엔지니어까지 모두 해고를 당하고 SF 오피스를 닫는, 그런 정리수순이었다. 원래 HQ 가 SF였다가 당시의 모회사에게 인수되며 회사 전체의 HQ 가 모회사의 HQ, 즉 중부, 로 바뀌었었는데, 많은 직원들은 현 경제의 흐름과는 크게 상관없이 모회사에서 인수 이후 파워게임을 한 것이다라는 얘기도 오고 갔다.
이랬든 저랬든, 해고의 타이밍이 이것보다 더 안 좋을 수도, 혹은 더 좋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찍 소식을 아는 것이 정말 결혼식 바로 전날 아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왜 하필 그게 상견례 당일 새벽이어서 안 그래도 초조한 마음에 불을 지피려 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나는 잠들지 못했고, 상견레날 새벽은 결국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이 되어 상견례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나기 직전, 나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현재의 무드가 상견례를 망치면 절. 대. 안된다!" 어떠한 걱정이던, 결정이던, 작은 생각이던, 일단 접어두고, 상견례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들어가서 성공리에 마치고, 해고와 관련한 모든 고민과 결정은 상견례 이후에 하기로 했다.
그렇게 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동굴 속 구석으로 몰아내 돌로 강하게 막아버리고 상견례 장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