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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모레비 Jan 01. 2024

내 생애 최초의 그랜드 투어

1993년 봄날의 수학여행

 기억에 남아 있는 나의 첫 여행은 1993년,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수학여행이다. 그전까지 나는, 우리 가족은 여행이라는 것을 안 갔던 것 같다. 여행이라고 할 만한 흔적이 기억에도,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두꺼운 사진첩에도 없으니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기껏해야 연례행사처럼 여름 휴가철에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청천 뒤뜰(충북 괴산군 화양구곡인데 어릴 때 어른들은 그냥 이렇게 불렀다) 강변에서 야영하는 게 다였다. 수영할 줄 몰랐던 나는 흐르는 강물 위에 튜브를 띄우고 그 위에서 진미채를 질겅질겅 씹으며 일광욕을 했다. 한 번은 발이 닿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 처음으로 ‘죽음의 실제 공포’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손에 쥐고 뭘 들여다볼 게 마땅히 없던 시절이라 물에서 나오면 어떻게든 심심풀이 대상을 찾아야 했다. 애꿎은 잠자리와 개구리, 사슴벌레,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 등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됐다. 당시 아빠들은 고스톱에 열중했다. 화투장이 착착거리는 평상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면 돈을 딴 누군가가 매점으로 담배와 술 심부름을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심부름 값으로 천원짜리 한두 장이 떨어졌다. 한쪽에선 엄마들이 음식을 해가며 간혹 아이들을 챙기며 수다를 떨었다.



 학교에서 받아온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을 엄마에게 드리자,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다. 수학여행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나는 잡동사니 등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작은 패니 팩(Fanny pack) 하나와 얇은 점퍼, 신발, 모자 등을 얻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동네 어른들이 용돈 하라며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주셨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버스 타고 며칠씩 놀러 간다는 사실에만 설레며 며칠 동안 마음이 붕 떠 있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날, 아빠는 장롱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주며 새 필름을 카메라에 넣어 주셨다. 분명히 여분으로 코닥 36방짜리 필름 두 통을 더 주셨는데, 건진 사진은 10장 정도였다.


1750년경 로마 그랜드 투어에 참가한 영국 신사 ©english-heritage.org.uk


 17세기 유럽 귀족은 자식들을 사회에 내보내기 전 세상 물정과 문명을 경험하라는 의미로 자체적인 수학여행을 보냈다. 그 수학여행을 '그란 투리스모(Gran Turismo)' 혹은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했다. 장거리 여행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고성능 자동차를 뜻하는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도 여기서 따왔다. 그렇다. 옛날에도 수학여행(修學旅行)은 귀족이나 갈 수 있는 거였다. 물론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압적인 세뇌 목적으로 도입됐다가 해방 이후 교육적으로 그 본질이 바뀌었지만, 공교육 정책 덕에 1993년 5월, 나는 생애 첫 그랜드 투어를 떠날 수 있었다.



 어디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런데 H(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 덕에 경주는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때 우리는 도투락 월드(지금의 경주 월드)의 유스호스텔에서 묵었는데, 이 녀석이 어디에서 마셨는지 저녁에 술을 한잔 걸쳤다. 취한 녀석은 밤새 동요를 중얼거리며 초딩스러운 주사를 부렸다. “송아지, 송아지 미친 송아지, 엄마 소는 얼룩소~” 그러면서 개사해 불렀는데, 그땐 모두가 유치할 때라 그게 그렇게 웃겨서 밤새 키득거렸다. H는 다음날 숙취 때문에 여정 내내 꽤 고생했다.


 그때 엄마는 나에게 3만원 정도의 용돈을 주셨다. 하지만 초등학생의 수학여행은 딱히 돈 쓸데가 없다. 어디까지나 비상금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효자손 등을 바리바리 샀다. 결국 돌아오는 말이 “이런 쓸데없는 걸 뭐 하러 사 왔냐”였던 걸 보면 그냥 뭐라도 사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한 가지 의뭉스러운 점은 여자애들과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는 것이다. 내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은 죄다 남자애들과 찍은 사진이다. 심지어 단체 사진조차. 이때는 일부러 남녀칠세부동석을 원칙으로 이렇게 찍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사진을 누락한 걸까? 생각해 보면 그때도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들은 없었다. 그 점이 가장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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