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모레비 Jan 01. 2024

우리는 유괴당할 뻔 했다

1993년 인켈 밴 괴한의 습격 사건

 어느 날 H가 말했다. “우리 집 갈래?” “그래.” H는 우리 반에서 집이 가장 멀었다. 대부분 걸어서 통학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H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것도 거의 한 시간씩이나 걸려서. H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당시 계급은 준위였다. 준위는 서열상 소위보다 아래지만, 부사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계급으로 실제로 군 내에서 받는 대우는 다르다. 그때 우리야 잘 몰랐지만, 담임 선생님은 그의 아버지 계급을 알고 나서부터는 H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적어도 내 느낌에는 그랬다.


 H네 집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초등학생 6학년에게는 긴 여행이었다. H는 분평동 외딴곳에 있는 군인 사택에 살았다. 똑같은 단층 주택 네 채가 모여 있었는데, 마치 외국에 나오는 집처럼 이국적이었다. 집은 꽤 넓었다. H는 자기 방이 있었다. 방문에는 시카고 불스 마크가 그려진 작은 농구대도 붙어 있었다. 집에는 BB탄 총 등 놀거리가 가득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바로 냇가가 있었고, 인근은 나대지여서 인적은 드물었다. 이 사택 네 채 말고는 근방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심심할 수 있지만, 모험심 강한 초등학생 6학년 남자아이 둘이 놀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수학여행을 가서도 우리는 항상 붙어 다녔다


 우리 둘은 금세 베프가 됐고, 나는 종종 H네 집으로 놀러 갔다. 자고 오는 날도 잦았다. H 부모님은 오히려 좋아하셨다. 내가 집에 놀러 오는 날이면 용돈을 두둑하게 두고 어딘가 가셨다. 우리는 저녁에 피자를 시켜 먹고, 빌려온 비디오를 밤새 봤다. BB탄이 가득하게 든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가 아무것이나 겨냥하고 맞추며 놀았다. 딱히 신나는 일이 없어도 둘이 자유롭게 놀 수 있어 그 자체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저녁에 피자를 시켜 먹고 우리는 BB탄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야간 게릴라 작전을 펼치는 군인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과녁(그래봤자 나무나 캔 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놀다 집으로 가려는데, 다리 위 모퉁이에 아까 못 보던 차 한 대가 있었다. 흰색 베스타였고, 짐칸이 있는 밴이었다. 겉에는 ‘inkel’이라고 쓰여 있었다. 근처 인켈 매장 차인가보다 하고 가려는데 H가 우뚝 멈췄다.


 “잠깐만, 보닛 앞에 사람이 숨어 있어.”


 멀어서 희미했지만,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림자는 틀림없이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저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리를 잡아채려는 괴수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우리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동시에 우리가 눈를 챘다는 걸 모르게 하려고 의미 없는 사격을 통통 했다. 야속하게도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어떡하지?” / “일단 저쪽으로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보자.”


 H는 확실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인켈 밴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렇게 30분 정도 우리는 대치했다. 시간이 갈수록 밤공기가 싸늘해졌다. 집으로 가려면 저 길밖에는 없었다. 괴수는 그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결국 내가 추위에 굴복하고 말했다.


 “아닐 수도 있잖아.” / “그럼, 다리를 건너자마자 뛰어서 집까지 가자.” / “그래.”


 H는 반에서도 유명한 운동 천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쿵푸를 배워 깡다구가 셌고 몸이 날렵했다. 달리기도 잘했다. 반면, 나는 태권도도 노랑 띠에서 멈췄고, 달리기는 항상 꼴찌였다. 자신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혹시 몰라 갖고 있던 BB탄 총을 연사 모드로 바꿨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다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멈춰 있던 그림자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나는 멀더라도 가장 가까운 가게로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H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놀란 나도 덩달아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웅크리고 있었던 괴한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H를 낚아채려 했다. H는 순간적으로 안 잡히려 몸을 구부리며 바깥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달렸다. 나의 허벅지에도 최대토크가 폭발했다. 공포가 극한에 달하자, 초인적인 힘이 발휘됐던 걸까? 나는 어느새 H를 앞질러 뛰고 있었다. H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 나는 앞만 보고 뛰었다. 뒤에서 H가 “저리 가요 아저씨.”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사택이 가까워지자 나는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괴한도 안 되겠는지 다시 차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내 소리에 사택에서 몇몇 어른들이 나왔다. H는 집으로 후다닥 들어가더니 가스총을 들고나왔다. 흰색 인켈 밴은 우리 쪽으로 오려다 사람들이 나오자 황급히 차를 돌렸다. 얼마 안 있다 경찰이 왔고, H의 부모님도 오셨다.


 그때부터 난 수상한 차만 보면 번호판부터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때 그 흰색 인켈 밴의 차 번호를 볼 생각을 못 했던 게 너무나 바보 같고 후회된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납치하기 위해 처음부터 밴을 준비했다는 게 더 소름 돋는다. 사람을 밀어 넣고 해치를 위에서 아래로 탁 닫기만 하면 끝이다. 순식간에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 짐칸은 창문도 없고 완전히 밀폐돼 있다.


 이 일이 있기 2년 전인 1991년 3월, 우리 또래의 아이들 다섯 명이 대구 와룡산에서 한꺼번에 실종된 일이 있었다. 일명 ‘개구리 소년 사건’인데, 2002년 백골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명칭이 정리됐다. 이 사건은 아직도 수많은 이슈와 의문점만 남기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때는 한창 대한민국이 ‘유괴’라는 키워드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상황은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다. 한동안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아마도 그 이후로 H의 집에는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이 됐다. H의 어머니는 차에 H와 나를 태우고 짧은 여행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했다. 꽝꽝 언 호수 위에서 신고 있던 신발로 스케이트를 탔다. 공군사관학교 구경도 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노래방을 갔었다. 당시 김민종의 열혈 팬이었던 H를 위해 <하늘 아래서>를 불렀다. 내가 노래방에서 최초로 부른 노래다. 이땐 변성기가 오기 전이라 깔끔하게 완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H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그리고 우린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고, 나는 다시 대구로 이사를 가면서 그와 연락이 끊어졌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다시 한번 만났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연락은 다시 끊어졌다. 아직도 연락은 닿지 않고 있다.




P.S. H,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꼭 연락 주기를 바란다. 다시 여행이나 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내 생애 최초의 그랜드 투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