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충격적이었던 수학여행
1995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고 잔인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다(혹은 포기했던 것 같다). 또다시 가족을 버린 채 어딘가로 떠났다. 우리는 한순간에 집을 잃어버렸다. 말 그대로 거리에 나앉았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다. 급한 대로 동네에 ‘맛나분식’이라는 식당을 냈다. 인기 메뉴는 김밥과 떡볶이, 떡만둣국 등이었다. 집은 없었다. 가게 한쪽에 스티로폼을 깔고 커튼을 쳤다. 세 사람의 잠자리였다. 싱크대에서 세수와 양치를 했다. 상가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방과 후 갈 데가 없었다. 돈 안 들이고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청주 중앙도서관 열람실뿐이었다. 오후 9시 50분쯤에 항상 경비 아저씨가 순찰을 돌았다. 문을 닫는다는 신호였다. 그때 나도 가방을 싸서 나왔다. 엄마도 그때쯤 가게 문을 닫았다. 늦은 저녁 식사는 언제나 팔고 남은 김밥과 떡볶이였다. 꽤 맛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김밥 맛을 기억한다. 손님들이 앉았다 떠난 식탁은 그때부터 내 책상이 됐다. 불 꺼진 가게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새벽 1~2시까지 문제집을 풀었다. 아침에 가게 셔터를 열고 나오는 모습을 동네 애들이 볼까 봐 일찍 집을 나섰다. 등교하고 나면 아침에 시간이 남았다. 또 문제집을 풀었다. 어쩔 수 없이 반에서 가끔 1등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얼마 후 엄마는 가게 옆옆집에 단칸방을 얻었다. 더 이상 스티로폼 위에서 안 자도 돼서 굉장히 신이 났었다. 다만 화장실이 재래식이었다.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나는 기존대로 상가와 학교 화장실을 이용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수학여행 일정을 공지하며 가정통신문을 나누어 주셨다. 갱지 한 장의 무게가 꽤 묵직했다. 단칸방 덕에 삶의 질이 약간 나아졌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은 그대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엄마는 감기, 몸살을 꽤 오래 앓았다. 병원 대신 동네에서 용하다는 대청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으며 그럭저럭 버티는 중이었다. 장사도 한동안 못했다. 나는 결국 5만원이 넘는 수학여행비 납부 안내가 적힌 가정통신문을 가방에서 꺼내지 못했다. 나에게 그 종이는 일종의 고지서처럼 느껴졌다. 선생님께는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돈이 없다. 엄마도 아프시다. 그냥 학교에 나와 문제집을 풀겠다고. 하지만 어른들은 일찍 철든 척을 하는 병에 걸린 중2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전화하셨고, 엄마는 나를 나무라며 수학여행비를 주셨다. 삼촌과 숙모는 시내 리복 매장에서 티셔츠도 하나 사주셨다. 그렇게 나의 ‘멋있는 척 계획’은 수포가 됐다.
교복을 벗고 친구들과 며칠 함께 돌아다녀 보니 그때까지는 잘 몰랐던 빈부의 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난 사창시장에서 엄마가 사주는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가방을 멨었다. 알고 있는 메이커라고는 나이키와 리복, 아디다스 등이 전부였다. 그런데 여행을 가보니 누군가는 에어조단과 인스타 펌프 기능이 들어간 샤크 시리즈를 신고 왔다. 누군가는 20만원이 넘는 열브스름한 회색 게스 코트를 입고 왔다. 누군가는 닉스와 보이런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등의 청바지를 입고 왔다. 누군가는 수학여행비에 달하는 필라 백팩을 메고 왔다.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소수였지만)의 아이템에 흥분하며 떠들었다. 압권은 당시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지 아하프리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등장이었다. 전자식 이퀄라이저가 탑재돼 있고, 이어폰과 연결된 리모컨에는 작은 액정 화면이 들어가 있어 전자수첩 기능까지 하는, 게다가 무선 전화기처럼 도킹 방식으로 충전이 되는(나중에는 스피커와 도킹까지 된), 당시로서는 지금의 신형 아이패드 프로 뺨치는 매우 고가의 귀한 아이템을 누가 가져온 것이다. 아하프리의 주인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는데, 아버지 직업이 자선사업가라고 했다(이런 직업도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친구는 교실에서 내 앞에 앉아 항상 우리는 도시락을 같이 먹었는데, 미니 돈가스를 위한 앙증맞은 미니어처 케첩 병까지 싸 온 것을 보고 나는 얼얼한 충격을 받았었다. 나중에 어떤 책에서 낯선 문명과 마주한 마야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왠지 모르게 그때 그 친구의 뽀얗고 안경 쓴 얼굴이 떠올랐다.
사진첩을 뒤적여 보니 설악산도 갔고, 자연농원도 갔었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역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1995년 수학여행에서 나는 같은 교복을 입었다고 다 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봤던 건 설악산도, 자연농원도 아닌 친구들이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물질적 비교가 아니다. 교실에서는 몰랐던 친구들의 라이프 스타일, 취향, 가치관, 배경, 꿈, 노력 등에 관해 이야기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물론 그중에서 쇼크가 가장 컸던 건 한 교실에서 이렇게 상대적인 빈부의 격차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세상 이치인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나는 이때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책으로만 세상을 배우고 있는 개구리 같은 내 삶을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가난을 직격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도, 할 수 있는 게 그저 문제집 푸는 게 다인 어린 나이도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까마귀 소년의 말처럼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를 매일 꿈꿨다. 그리고 진득하게 준비하며 기다렸다. 자유롭게 세상에 도전하며 여행할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