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5 여행의 답은, 곧장 가지 않는 데 있었다
파리를 벗어나 남동쪽으로 향했다. 목적지인 스위스 제네바에 가기 위해선 프랑스의 남부 도시 리옹(Lyon)을 거쳐야 했다. 파리에서 리옹까지는 약 460㎞, 차로 약 4시간 30분 거리다. 길은 쉽다. A6 고속도로를 따라 쭉 내려가면 나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 파리 말고 어떤 도시가 있더라? 니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리옹까지 곧바로 가기엔 뭔가 아쉽고 아까웠다.
경로를 살펴보던 중 중간에 아발론(Avallon)이라는 작은 도시가 보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아발론(Avalon)은 브리튼 섬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전설 속의 해상 낙원이다. 아서왕의 시신이 여기에 있다고 전해진다. 그 아발론과 뭔가 관계가 있을까? 늦은 점심 식사도 해야 할 겸 무작정 아발론으로 들어섰다.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에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곳만 중세 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쿠생(Cousin) 강을 아래에 두고 마치 요새처럼 조성됐다. 성벽과 방어탑, 좁은 골목길, 반목조 건물 등에 누가 방부제 처리를 한 듯 잘 보존돼 있었다. 진짜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을 보며 넋 놓고 걸었다. 그러다 익숙한 로고 하나가 눈에 들어와 아무 고민 없이 그리로 들어갔다. 2018 미슐랭의 선택을 받은 곳이었다.
Les Cordois Autrement는 부르고뉴의 전통 요리를 재해석해서 내놓는다. 부르고뉴식 달팽이, 레드 와인에 조리한 달걀, 겨자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신장, 모르토(Morteau) 소시지와 크림치즈소스를 곁들인 연어 에스카로프 등 전통과 독창성의 조화가 돋보인다.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이 요리들을 맛볼 수 없었다.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오직 디저트와 와인만 주문할 수 있었다. 다른 식당도 상황은 마찬가지. 그래도 부르고뉴의 신선한 와인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 텅 빈 위장에 운석처럼 떨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밖에는 소나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 올드타운은 마치 테마파크의 한 섹션 같아서 금방 구경할 수 있다. 식당 근처에 관광 안내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개구리 서킷 가이드북’을 2유로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 뭔가 개구리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그냥 이 도시의 현대판 마스코트 같은 거다. 서킷 가이드북에 안내된 대로 청동 개구리 표지판을 따라 걸으면 도시의 주요 명소들을 방문할 수 있다. 주로 성 라자르 교회(Collégiale Saint-Lazare,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를 기점으로 도심 골목길과 시계탑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성벽 아래로 내려오면 계곡을 따라 쿠생 강이 흐른다. 여기가 또 기가 막힌다. 요새 위에서 보는 전망과 달리 자연 속에서 올려다보는 성벽의 뷰가 예술이다.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근처에 모르반(Morvan) 국립 자연공원이 있는데 하이킹 코스로 인기라고 한다. 아니, 그냥 여기만으로도 넉넉하다. 쿠생 강가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다. 하룻밤의 시간이 더 있었다면 이 풍경과 함께 낮부터 부르고뉴 와인을 몇 병이고 쭉쭉 들이켰을 것이다.
쿠생 강에 아쉬움을 한 보따리 남겨두고 다시 리옹으로 운전대를 틀었다. 아발론은 근처도 근사하다. 갈 길이 바쁜데, 자꾸 주변 풍경에 홀려 샛길로 빠졌다. A6 고속도로로 진입하기까지 한참 걸렸다. 무한대로 펼쳐진 숲과 들판을 보며 천천히 시골길을 달렸다. 프랑스에는 파리만 있는 게 아니다. 갑자기 아까 그 소나기가 다시 지나갔다. 마치 누가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부은 듯 와락 내렸다가 그쳤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무지개를 보냈다. 그것도 두 개나. 난생처음 본 쌍무지개였다. 북유럽 신화에서 쌍무지개는 신들의 특별한 메시지로 해석된다. 서양에서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보기도 한다. 미신을 믿진 않지만, 실제로 그 해에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렸다. 불안한 프리랜서의 삶을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미친 듯이 일이 몰려들었다. 돈도 많이 벌고, 많이 썼다. 갖고 싶은 것은 고민하지 않고 샀다. 드디어 회전초밥을 먹을 때 접시의 색깔을 안 보고 먹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에게 쌍무지개는 행운의 상징이 확실하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우리는 리옹에 도착했다. 리옹은 파리와 마르세유에 이어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뤼미에르 형제가 여기 출신이라 1895년 최초의 영화가 바로 리옹에서 상영됐다. 강 위로 고니 몇 마리가 쓸쓸하게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리옹은 두물머리처럼 론(Rhône)강과 손(Saône)강이 만나 옛날부터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비단 무역이 성행했는데, 지금도 구시가지에 가면 과거 비단 직조 업자들이 직물을 비에 젖지 않게 옮기기 위해 만든 비밀스러운 통로가 300개 이상 존재한다. 이를 트라불(Traboules)이라고 한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둘러봤을 텐데, 기약 없는 다음 날로 남겨두었다. 파리에서 리옹으로 곧장 왔다면, 행운의 쌍무지개도, 동화 같았던 아발론도 못 봤을 것이다. 경로를 잠시 벗어나는 것도 꽤 괜찮은 여행법이다.
Mar,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