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19 내가 파리에 다시 온 이유
파리에 처음 온 날, 트로카데로(Trocadéro) 광장에서 저 멀리 거대한 에펠탑의 실루엣을 봤을 때, 그때 처음으로 파리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그 거대한 철의 구조물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사진 속에서는 수없이 보아온 풍경이었지만, 실제로 눈앞에 마주한 에펠탑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 거대한 철골이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뻗어 있는 모습은 장엄했고, 그 아래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묘한 생명력을 만들어냈다.
이 거대한 철탑은 단 2년 2개월 5일 만에 완공됐다. 철제 부품 18,038개, 리벳 250만 개. 숫자로만 보면 거대한 기계 같지만, 여름이 되면 이 철탑은 열을 받아 15cm쯤 하늘로 더 솟는다. 살아 있는 생명처럼. 설계자는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지만, 실질적인 설계도는 엔지니어 모리스 케클랭과 에밀 누기에가 담당했다. 파리 사람들은 에펠탑이 처음 완공됐을 때, 흉물이라며 철거를 요구했다. 예술적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추악한 고철이라며 욕했다. 하지만 탑이 완공될수록 사람들은 에펠탑에 익숙해졌고, 급기야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어졌고, 그렇게 전 세계적인 명물이 됐다. 자꾸 보면 예뻐지는 법. 이렇게 처음에는 무관심했거나 싫어했어도 자꾸 보면 볼매가 되는 걸 에펠탑 효과라고 한다. 에펠탑은 1903년 프랑스 최초의 무선 전신 송신탑으로 사용됐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암호 해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라디오와 TV 전파 송출에 활용 중이며, 최상층에는 기상 관측소와 실험실이 있다.
에펠탑을 처음 본 날 저녁, 퐁피두센터 꼭대기 조르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바라본 반짝이는 에펠탑은 내게 파리를 사랑하게 만든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서서히 퍼져나가고, 정각이 되자 에펠탑 전체가 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나는 반드시 이 도시에 다시 오게 될 것이라는 걸. 그 뒤로 몇 번이고 파리를 찾았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혹은 그냥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라도, 나는 늘 이 도시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펠탑은 언제나 멀리서만 바라봤다. 파리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기에, 어느 거리에서든 그 뾰족한 탑의 실루엣을 볼 수 있다. 마치 도시의 심장처럼, 늘 그곳에 있었다.
루브르 근처에서, 센강 다리를 건너며, 혹은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보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에펠탑은 내게 ‘특별한 목적지’가 아니라 ‘늘 곁에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스쳐 지나가도 괜찮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 익숙함이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곁에 있어, 특별함을 잊었을 뿐.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에펠탑을 ‘다시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아침 일찍 샹드마르스 공원에 도착했다. 햇살은 부드럽고, 하늘은 맑았다. 관광객들은 이미 셀카봉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길가에서는 크루아상이 구워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나는 벤치 하나를 골라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천천히 베어 물며, 하늘을 향해 솟은 철탑을 바라봤다. 그 아래를 걷는 사람들, 그늘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부모의 모습이 유유히 흘러갔다. 도시의 중심에서 이렇게 느린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잠시 후, 탑 아래로 들어가 올려다보았다. 수천 개의 리벳이 엮어낸 철의 격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마치 정교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손끝으로 철의 차가운 표면을 만져보았다. 그 단단함 속에서 이상하게 따뜻한 감정이 느껴졌다. 파리 사람들에게 이 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오는 자부심이자 정체성일 것이다.
그날 오후에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잔뜩 찍었다. 관광객처럼 보일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 도시에서는 누구나 잠시 ‘여행자’가 되어도 괜찮았다. 사진 속의 나는 조금 어색했지만, 표정만큼은 진심이었다.
해 질 무렵, 센강 근처를 걸었다. 금빛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 에펠탑의 그림자가 강물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이는 물결이 철탑의 형체를 흔들며 일렁였다. 저녁이 되면 탑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또 한 번 변신한다. 정각이 되자 수많은 조명이 일제히 깜박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감탄사를 내뱉고, 누군가는 연인과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한 호흡으로 멈춘 듯했다. 내 눈앞에 반짝이는 에펠탑은 단순한 철 구조물이 아니라, ‘빛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심장이었다.
개선문 꼭대기에서도 에펠탑은 빛났다. 에투알 광장을 내려다보며 반짝이는 탑을 다시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본 에펠탑은 낮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밤의 어둠을 배경으로 더 강렬하고, 더 고요하게 빛났다. 나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나를 파리로 인도한 기폭제는 에펠탑이었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도, 우리가 사랑했던 풍경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풍경은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반짝이며, 다시 길을 잃은 우리를 부드럽게 이끌어준다. 파리는 나에게 그런 도시다. 그리고 에펠탑은, 여전히 그 한가운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Nov,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