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강에서 유람선을 타면 보이는 것들

프랑스 #20 내 인생도 이렇게 근사하게 흘러갔으면

by 조디터 Joditor

파리 여행 내내 늘 그렇듯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아직도 보고 싶은 풍경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센강 유람선은 꼭 타보고 싶었다. 강에서 보는 도시의 풍경은 다르니까. 단순히 명소를 보는 관광 코스가 아니라, 도시의 심장을 따라 흐르는 물 위에서 파리는 어떤 모습일까?


예약할 때 고민했다. 낮과 밤, 어느 시간대가 좋을까? 결국 ‘해 질 녘’을 선택했다. 낮의 활기와 밤의 낭만이 교차하는 그 짧은 시간대. 낮의 파리와 밤의 파리, 두 얼굴을 모두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배가 출발하는 에펠탑 앞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여기도 곧 겨울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들뜨고 따뜻했다. 강물 위로 석양이 길게 늘어지고, 하늘은 천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유람선 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언어는 달랐지만, 모두의 표정엔 같은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설렘, 그리고 기대.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두가 동시에 일어섰다. 에펠탑이 점점 멀어지며 시야 속에 담겼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았다. 강가를 따라 걷던 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파리에 잘 왔다”라고, “좋은 여행 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들의 미소가 강물에 비쳐 일렁였다.


유람선은 천천히 도시의 중심을 가르며 나아갔다. 아메리칸 처치(American Church in Paris)의 종탑이 보였고, 그랑 팔레(Grand Palais)의 유리 지붕이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알렉상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III)였다. 금빛 조각상과 아치형 다리가 저녁 빛을 머금고 있었다. 파리의 우아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다음은 알베르 1세 기마상(Statue équestre d'Albert I)이 소심하게 흘러가고, 프랑스 국회의사당인 부르봉 궁전(Assemblée nationale)이 웅장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배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건물 위로, 다리 아래로, 그리고 서로에게로 흘렀다. 센강에서 본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이 낯설게 느껴졌다. 수없이 봤던 사진 속의 미술관이었지만, 물 위에서 바라보니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역시 그랬다. 웅장한 궁전이 아니라, 강가의 한 장면으로서 고요히 존재했다. 그 낯섦이 오히려 더 근사했다.


저 멀리 대관람차(Roue de Paris)가 보였다. 거대한 관람차는 해 질 무렵의 하늘과 어우러져 마치 파리의 시간마저 천천히 돌리는 것 같았다. 파리 최초의 금속 다리인 퐁데자르(Pont des Arts)를 지나며 보수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리 위의 공사 천막 사이로 비치는 성당의 실루엣이 묘하게 먹먹했다. 불길에 타오르던 그날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복원 중’이라는 사실이, 파리의 회복력처럼 느껴졌다.


노트르담을 지나자마자,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그 순간부터 파리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켜지는 조명이 강물 위로 떨어져 반짝였다. 건물들은 실루엣만 남기고, 그 자리에 빛으로 새 옷을 입었다. 센강은 이제 거울이 되어 도시를 품었다.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던 퐁데알마(Pont de l'Alma)를 지나며 돌아오는 길, 조금 전 지나쳤던 풍경들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지만,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같은 곳이지만, 다른 파리.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물 위의 불빛들이 춤을 추듯 흘러갔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 어떤 온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바라보거나, 혹은 감탄사를 속삭였다. 파리의 야경은 보면서 즐기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온전히 머물러야 한다.


유람선이 다시 출발지로 돌아왔다. 떠날 때는 잿빛 철제 구조물이었던 에펠탑이 화려한 오렌지빛으로 드레스를 갈아입고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갑자기 수천 개의 불빛이 동시에 켜졌다. 반짝, 반짝, 반짝. 에펠탑은 밤의 여왕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그 장관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어디선가 박수가 터지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마음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물결 위로 반짝이는 불빛, 사람들의 웃음, 강가의 음악 소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파리라는 이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돌아보면, 파리의 매력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 있었다. 낯선 도시의 냄새, 차가운 바람, 그리고 그 안에서 스며드는 따뜻한 감정. 센강 위에서 흘러간 시간은 어쩌면 내 안의 감정이 흘러간 기록이었을지도 모른다. 빛이 꺼진 뒤에도 한동안 가슴속에서는 반짝임이 멈추지 않았다.


No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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