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2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파리 중심부 센강 근처를 걷다 보면 튀일리(Tuileries) 정원의 끝자락에 고전적인 석조 건물이 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네 개의 기둥이 세워진 정면,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ORANGERIE’. 루이 14세 시절, 튀일리 정원의 오렌지 나무들을 겨울철에 보호하기 위해 1852년에 세워진 공간이 지금은 인상주의 작품들을 머금은 미술관이 되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면, 파리의 소음이 문밖으로 사라진 듯 고요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 펼쳐진 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마지막 걸작, ‘수련(Les Nymphéas)’ 연작이다. 타원형의 전시실 벽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캔버스들 앞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숨을 고른다. 어떤 이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캔버스 바로 앞까지 다가가 붓질의 결을 따라 눈을 움직인다. 총 8개의 캔버스가 두 개의 타원형 방에 설치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를 합치면 무려 약 100m에 달한다. 하나의 회화가 아니라 ‘몰입형 파노라마’에 가깝다.
붓의 흔적은 분명한데, 형태는 흐릿하다. 푸른색, 보랏빛, 황금빛이 번지며 수면 위에 반사된 하늘과 구름, 그리고 연못 속 수련의 형체를 암시한다. 가까이서 보면 단순한 색의 덩어리 같지만, 몇 걸음 물러서면 그 안에 시간과 공기가 흐른다. 마치 새벽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착각, 그게 모네의 ‘빛의 회화’가 주는 마법이다.
첫 번째 전시실의 오른편에 있는 작품은, 푸른 물결 속에 보랏빛 구름이 내려앉은 듯 몽환적이다. 빨간 비니를 쓴 한 관람객이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모네가 자신의 정원에 선 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에게도 이 순간은, 그림이 아닌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온 것일까?
모네는 말년, 전쟁 후 평화를 상징하는 예술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는 직접 전시실의 형태와 빛의 방향까지 구상하며 “무한한 수평의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 이 공간이 지금의 타원형 ‘수련의 방’이다. 모네는 자신의 작품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 속에서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전시실 천장은 반투명 유리 천창으로 되어 있어, 실제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작품의 색이 달라 보인다. ‘수련(Les Nymphéas)’은 모네의 고향 ‘지베르니(Giverny)’ 정원의 연못을 모티브로 삼았다. 지베르니를 방문하면, 오랑주리에서 본 ‘수련의 현실판’을 직접 볼 수 있다.
모네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전시실로 향하자, 공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벽에는 Sam Szafran (1934–2019) 이라는 이름과 함께, “Obsessions d’un peintre(한 화가의 집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샘 사프란(Sam Szafran)의 작품 앞에 서면, 인상주의의 흐릿한 빛 대신 세밀하게 그려진 식물의 잎맥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복잡하게 얽힌 식물들과 투명한 온실 안의 빛을 정교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마치 식물의 덩굴이 캔버스를 뚫고 나올 듯한 생동감이 있다. 그는 빛보다 ‘선’과 ‘공간의 질감’에 집착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모네의 정원과 달리, 사프란의 공간은 살아 있고, 숨 쉬며, 약간은 불안하다.
오랑주리 미술관이 두 화가를 같은 공간 안에 배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빛과 색으로 세상을 녹여낸 화가와, 선과 밀도로 세상을 붙잡은 화가. 그 둘의 차이는 곧 예술이 바라보는 ‘현실’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2층으로 향하니, 다시 익숙한 이름들이 반긴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벽면을 가득 채운 이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빛의 회복’ 같다. 모네의 수련이 고요한 물결이라면, 이들은 햇살이 스며드는 오후의 창가 같다. 마티스의 ‘꽃병과 소녀, 분홍색 배경’ 앞에 서면 눈이 먼저 웃는다. 짙은 분홍색 카펫과 노란 벽지, 파란 꽃병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마치 색이 노래하는 듯하다. 그 옆에는 르누아르의 ‘복숭아’,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 걸려 있다. 특히 피아노 앞의 두 소녀는 르누아르 특유의 부드러운 붓 터치로 그려져 있어, 피부의 온기까지 느껴진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삶의 소소한 기쁨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친구의 딸들을 모델로 삼았으며, 이 그림은 여성의 일상과 음악의 행복을 상징한다.
가장 눈길을 끈 건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마차 타는 가족’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가족과 흰말, 그리고 옆을 지나가는 작은 검은 고양이.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정직한 구도, 어린아이 같은 색감이 오히려 강렬하게 다가온다. 루소는 전문 화가가 아니었고, 평생 세관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 어떤 화려한 기법보다도 ‘세상을 사랑하는 눈’이 담겨 있다. 그 단순함이, 오늘날에도 보는 이를 미소 짓게 만든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매력은 단지 작품의 유명세에 있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장소’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누구나 한참을 서서 바라보고, 천천히 걷는다. 마치 캔버스 안의 색들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관람객도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밖으로 나오니 가을의 끝을 잡고 있는 햇살이 튀일리 정원에 부드럽게 내리쬐었다. 모네가 그렸던 빛의 결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도시의 소음이 다시 들려오기 전, 나는 잠시 그 고요를 되새긴다. 물결은 멈춰 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게 바로, 오랑주리 미술관이 주는 가장 깊은 감동이었다.
Nov,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