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2

by 조디터 Joditor

새로 바뀐 빳빳한 ‘원’화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선남의 거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돈. 그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선남의 고향은 진천이 아니다. 충청북도 땅에서 까마득히 먼 남쪽, 전라남도 장흥이다. 진천의 억센 비바람을 맞고 살기 전, 선남은 장흥의 바닷바람과 흙내를 맡으며 젊음을 다 바쳤다. 열일곱 곱던 시절에 만나 혼인한 사내, 유승근 때문이었다.


승근은 전라남도 일대 장터를 주름잡는 유명한 타짜였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늘 바람처럼 떠돌았다. 며칠이고 몇 달이고 노름판을 전전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하룻밤 훌쩍 선남의 배를 불려놓고 또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쩌다 몇 달 만에 집에 돌아온 승근이


- 아해가 하나 더 늘었는가?


하며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물었을 때, 선남은 소리 내어 울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이 무려 다섯이었다.


승근이 어쩌다 던져주고 가는 노름 돈 몇 푼으로는 예닐곱 식구의 입에 거미줄 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생계는 온전히 선남의 몫이었다. 선남은 악착같았다. 봄이면 산비탈을 타며 나물을 캤고, 가을이면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들도록 도토리와 밤을 주워다 장에 내다 팔았다. 농번기에는 남의 집 논밭이며 과수원을 가리지 않고 품을 팔았다. 겨우내 땅이 숨을 돌릴 동안에는 득량만에서 굴과 낙지 등을 캐 내다 팔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밥그릇 긁는 소리를 내며 칭얼거리는 다섯 아이의 입을 보면 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호가 갓 두 살을 넘겼을 무렵, 집 마당으로 낯선 사내 셋이 스르륵 나타났다. 승근의 노름빚을 받으러 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악을 쓰거나 세간살이를 부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차분하고 표정이 없었다. 마치 시체가 말하는 것 같았다.


- 걱정 마쇼. 돈만 주면 우리는 당장 떠날 거인게. 읍내 여관방에 방을 잡아 뒀으니, 내일 또 오겄소.


조용히 빚 독촉을 마친 사내들은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선남의 다섯 아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첫째 혜자부터 품에 안긴 핏덩이 정호까지. 그들은 마치 장터에 나온 물건의 값을 매기듯,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눈에 담고는 대문을 나섰다. 선남은 그 서늘한 눈빛을 본 순간, 머릿속으로 커다란 섬광이 번쩍 스쳤다.


그날 밤, 선남은 미친 듯이 짐을 쌌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다행히 달빛조차 숨은 그믐밤이었다. 선남은 열 살 난 첫째 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 혜자야, 동생들 깨워라. 소리 내지 말고, 어서.


잠투정할 새도 없이 어머니의 시퍼런 서슬에 놀란 아이들은 입이 틀어막힌 채 부스스 칭얼칭얼 일어났다. 선남은 등에 두 살배기 정호를 업고, 양손에 봇짐을 들었다. 네 명의 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장흥에서 최대한 멀리, 그 소름 돋는 사내들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어릴 적, 사촌 언니가 충북 진천 어딘가로 시집을 갔다는 낡은 기억 하나만이 선남이 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동네 개 짖는 소리에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새벽. 선남과 다섯 아이는 숨을 죽인 채 어둠을 뚫고 읍내 터미널로 내달려 첫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것이 선남이 정든 장흥 땅을 영영 등진 날의 기억이었다.


- 엄마? 왜 그래요? 어디 아파?


순자의 목소리에 선남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10분의 1로 깎여버린 돈뭉치를 쥔 손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여. 어여 가서 길자나 데려와. 저녁 먹게.


선남은 품속의 '원'화 뭉치를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도망치듯 살아온 세월,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새끼들을 지켜내리라 다짐하며 꽉 다문 입술 새로 빗물이 짭조름하게 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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