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자야, 아니 이 년은 동생들 잘 보고 있으라니까 또 어딜 간겨!
선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호는 혼자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정호는 고개를 푹 꺾어 땅을 뚫을 모양새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커다란 지렁이다. 방금까지 소나기가 대차게 땅을 적시고 간 덕에 몸을 축이러 나온 모양이었다. 네 살배기 눈에는 신기한 또 다른 우주였다. 정호는 지렁이의 엉덩이를 톡톡 건드렸다. 지렁이가 성큼성큼 나아갈 때마다 오리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 퍽
정호의 눈앞은 지렁이 대신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엄마의 검정 고무신으로 별안간 가득 찼다.
- 정호야, 누나 어딨어, 어디 간겨?
그제야 고개를 든 정호는 선남의 얼굴을 보자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지렁이를 터트렸다.
- 엄마, 왔어요?
순자가 대문을 살포시 열며 들어왔다. 손에는 자기 키보다 살짝 작은 종이우산이 하나 들려 있었다. 우산은 기름칠이 다 됐는지 흐물거렸다.
- 넌 동생들 혼자 두고 어딜 쏘다니다 오는겨?
- 엄마 비 맞을까 봐 우산 들고 어귀까지 갔었지.
- 그러다 정호한테 무슨 일 생기면 워쩔려고. 길자는 어디 간겨?
- 길자는 순복이네서 놀고 있어.
정호는 여전히 선남 뒤에서 빽빽 울고 있었다.
-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선남은 젖은 옷가지보다 품 안의 헛헛한 보자기 뭉치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평생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고, 입을 건너뛰며 모은 ‘환’ 돈이 고작 몇 장의 빳빳한 ‘원’화로 바뀌어 들어있었다. 10분의 1. 나라에서 돈 가치를 깎았다는 말이 선남에게는 제 살점을 떼어갔다는 소리로 들렸다. 읍내 농협 앞은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로 새벽부터 북새통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긴급통화조치 때문에 모든 국민이 기존에 가진 돈을 은행에 신고해야 했다. 그렇다고 모든 돈을 원화로 바꿔주는 건 아니었다. 정부는 당장은 소액만 신권으로 바꿔줬다. 일정 이상의 금액은 저축하게 했다. 그 돈은 국가 경제 개발 자금으로 쓰기 위해 일정 기간 인출이 제한됐다. 남은 돈을 강제로 예금해야 했기 때문에 은행 앞은 거센 항의로 소란스러웠다. 사실 선남은 예금할 만한 돈도 없었다. 전 재산이 몇 장의 종이 쪼가리로 압축됐다. 그렇게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내린 소나기는 선남의 마음을 진흙탕처럼 헤집어 놓았다.
-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순자의 풀 죽은 목소리에 선남은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비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종이우산을 든 채, 제 엄마 젖을까 봐 어귀까지 마중 나갔다는 딸아이의 발등이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화를 더 내서 무엇하랴. 세상천지가 개벽하듯 돈 이름이 바뀌고 난리가 나도, 제 어미 걱정하는 건 이 어린것뿐인데.
- 됐다. 가서 정호나 달래라. 그놈의 지렁이가 뭐라고 저리 악을 쓰나.
선남은 부엌문 턱에 걸터앉아 젖은 고무신을 벗어 던졌다. 진흙이 튄 버선 끝이 축축했다. 소나기의 끝물이 지붕의 볏짚을 타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방에는 이미 순자가 밥그릇 몇 개를 비가 새는 곳에 두었다. "똑똑" 소리가 정박에 맞춰 엷게 들려왔다. 선남은 올가을이 지나면 새 이엉을 만들어 덧덮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자가 조심스레 정호를 안아 올리자, 정호는 누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꺽꺽거리며 서러움을 토해냈다.
- 엄마, 돈은... 잘 바꿨어요? 이젠 ‘환’ 아니고 ‘원’이라면서요?
방 안으로 정호를 데려가려던 순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곱 살짜리 순자에게도 ‘돈이 바뀐다’는 소문은 무서운 도깨비 이야기만큼이나 마을을 흉흉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선남은 품 안의 보자기 뭉치를 슬쩍 손으로 눌러보았다.
- 그래, 바꿨다. 근데 순자야, 돈 이름만 바뀐 게 아니여. 세상이 아주 독해졌어.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우리가 가진 게 다 종잇조각이 된다잖냐.
선남의 시선이 마당 한구석, 자신이 짓밟아버린 지렁이의 흔적에 머물렀다. 꿈틀대던 생명도 무심한 발길질 한 번에 진흙과 뒤섞여 형체를 잃는다. 읍내에서 본 사람들의 표정이 딱 그랬다. 제 돈을 들고도 죄인처럼 줄을 서서, 이게 정말 내 돈이 맞느냐고 울먹이던 사람들. 왜 내 돈을 마음대로 못 쓰게 하냐고 성을 내던 사람들.
- 순자 너, 이 우산 어디서 났어? 기름칠도 다 벗겨진 거.
- 저번에 장날에, 순복이네 할머니가 버리려던 거 제가 가져와서 말려뒀던 거예요. 비 올 때 쓰려고.
선남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진천의 하늘은 언제 소나기가 퍼부었냐는 듯 구름 사이로 비릿한 햇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빳빳한 새 돈 몇 장이 든 보자기보다, 딸아이가 들고 있는 낡은 종이우산이 선남의 마음을 더 짓눌렀다.
- 순복이네 가서 길자나 데려오니라. 엄마가 읍내 나갔다가 눈깔사탕이라도 한 봉지 사 오고 싶었는데... 농협 문턱 넘기가 어디 쉬워야지. 대신 저녁엔 감자 좀 넉넉히 삶아 먹자.
선남은 젖은 버선을 벗어 비틀어 짰다. 새 돈으로 바꾼 세상은 아직 낯설고 무서웠지만, 진흙탕을 뚫고 마중 나온 딸아이의 헌 우산 아래서 선남은 겨우 집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