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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소리 Jun 27. 2017

베토벤 하일리겐슈트 유서의 집

Vienna - Beethoven House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쓴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에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자유에의 쟁취'로 표현한다. 음악사적인 측면에서 베토벤은 곡의 화성과 구성방식에 대해 끊임 없이 새로운 실험을 추구하였다. 또한 청각을 잃고서도 계속해서 음악활동을 한 그는 역경을 이겨내는 불굴의 열정과 정신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내게 베토벤은 좀 더 특별한 존재이다. 피아노를 치게 되면 특정 음악가와 묘하게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를테면 서로의 기가 교감하는 느낌, 남들이 모라하든 내가 스스로 작곡가로 빙의한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경험. 초등학교 시절, 방 안에서 불을 끈채 월광 1악장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어둠 속에서의 선율은 음악과 나 둘의 존재만 있기에 온전히 음악 더 빠져들 수 있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18세기 전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에는 클래식 음악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베토벤은 태어난 고향인 독일 본보다 더 오랜 시간인 35년 동안 비엔나에서 살았다. 비엔나에서 무려 40번 이상의 이사를 다녔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비엔나에서는 베토벤이 살았던 소를 여러 군데 만나볼 수 있다.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작곡한 베토벤 에로이카하우스 (Beethoven Eroicahaus),  교향곡 5번 운명및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한 베토벤 파스콸라티하우스 (Beethoven Pasqualatihaus) , 그리고 하일리겐슈트 유서를 썼던 베토벤 보너 하일리겐슈트 (Beethoven Wohnung Heiligenstadt) 가 비엔나에 있다.


비엔나에 머무는 동안 가장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 바로 베토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첫 행선지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파스콸라티하우스로 향했다. 십여분을 걷다보니 베토벤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건물을 발견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박물관을 상징하는 국기도 함께 보인다. 처음에는 같은 건물 다른 코너에 위치하고 있는 베토벤 기념품을 파는 가게먼저 눈에 띄어 들어갔다. 베토벤 가게와 박물관이 연결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건물 모퉁이를 돌아 다른 쪽 입구에 박물관이 있었다.


건물 벽면에 베토벤의 이름이 적힌 간판이 걸려있다
비엔나 박물관을 상징하는 비엔나 국기가 건물에 걸려있다


작은 문을 열고 나니 좁은 계단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몇층에 위치하는지 명확한 안내가 나와있지도 않았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4층에 이르니 베토벤 박물관 표시가 나왔다. 박물관인데 왜 이렇게 안내가 불친절할까 생각을 해보니, 이 건물의 일부만 베토벤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이 거주를 하는 듯 했다. 이 좁은 나선형 계단을 베토벤도 오르락 내리락 했을 거라 생각하니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베토벤 뮤지엄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파스콸리티하우스는 소유주인 조세프 베네딕트 베런 파스콸라티 (Josef Benedikt Baron Pasqualati)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건물은 18세기에 지어졌으며 그 당시 도시의 요새 부근에 위치하였다. 이 집의 4층에 8년동안 거주하였던 베토벤은 북부 교외 지역에 위치하여 개발되지 않은 장엄한 지역 경관을 좋아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이 곳에교향곡 4번, 5번, 7번 및 8번을 작곡했다. 또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썼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제를 위하여도 이 곳에서 작곡되었다고 한다. 베토벤의 삶과 작품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서와 초상화, 개인 물건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베토벤이 사용했던 피아노
책상 형태의 공간을 활용해서 편지와 같은 서식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오페라 피델리오 관련 자료
베토벤의 초상화
베토벤의 데스마스크


전시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와 보니 건물구조가 둥근 형태로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둥글게 둘러쌓인 공간 사이로 하늘이 담겨 보인다. 베토벤과 같은 장소에서 하늘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두번째 찾은 베토벤 박물관은  하일리겐슈트 유서를 썼던 베토벤 하일리겐슈트 유서 장소(Beethoven Wohnung Heiligenstadt) 이다. 베토벤은 1801년 청각을 잃을 수 있다며 시골에서 요양을 할 것을 의사로부터 권유받고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살게 된다. 그 곳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2번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G 장조와 D단조, 피아노 변주곡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청력이 더 악화되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괴로움에 두 명의 동생에게 유서를 남기게 된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내동생들, 카알 그리고 ○○ 베토벤에게

오! 너희들은 나를 적의에 차고 사람들을 혐오하는 고집쟁이로 여기고 또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그른 일인지 모르고 있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게 된 원인을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슴속에 따뜻한 마음과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뿐이랴? 가치 있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려는 갈망 또한 끊임없이 불태워 왔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거라. 6년이 넘는 동안 불치병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분별없는 의사들 때문에 더 이상 완치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게 되었다. 열정적이면서도 활기 넘친 기질의 소유자이자 사람들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고통을 잊으려고 애도 써 보았지만 잊을 수도 없었다. “들리지 않아요. 더 크게 말해 주십시오.”라고 사람들을 향해 고함칠 수 있겠느냐?

다른 누구보다도 완벽해야 할 나의 가장 귀중한 감각상의 약점을, 한때는 고금의 음악가들 중에서도 거의 비길 자가 없을 만큼 완벽했던 내 청각의 약점을 어찌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느냐. 사람들과 즐겨 어울리고 싶을 때조차도 나는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것이 세간의 오해를 초래하리라는 것과 벗들과 함께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어울릴 수조차 없다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마치 유형자와도 같은 생활이다. 그리고 사람들 가까이 접근해야 할 때마다 내 비참한 상태가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한다. 분별 있는 의사의 권유로 청각의 과로를 피하기 위해 전원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계속 그러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충동이 수없이 일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얼마나 굴욕적인 생각을 맛보게 되는 것이랴···.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플루트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도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는 목동의 노래 소리 또한 나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굴러 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예술, 오직 예술뿐이다.

나에게 부과된 모든 것을 창조하기까지는 어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비참한··· 정말로 비참한 삶을, 그리고 아주 사소한 변화조차 나를 최상의 상태에서 최악의 상태로 전락시키는 예민한 육체를 지탱해 왔다. 인내!! 라고 흔히 말하지만 이제 나도 그것을 지침으로 삼아야겠다. 그렇다. 그리하여 운명의 여신이 내 삶의 밧줄을 끊을 때까지는 저항하려는 결심을 간직하자. 내 상태가 호전되든 안 되든 각오는 서 있다. 예술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신이여, 당신은 내 마음이 인류에 대한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실 것이오. 오오,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대들이 나를 얼마나 부당하게 대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한 인간이,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자기 역량을 다해 마침내 예술가 또는 빛나는 인간의 대열로 솟아오름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라.

내 동생인 카알 그리고 ○○. 내가 죽은 다음 아직도 슈미트 교수가 살아 있다면 그에게 내 병상을 자세히 기록해 주도록 내 이름으로 부탁해 다오. 그래서 그것을 여기에 첨부해서 내가 죽은 다음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다오.
그 밖에 얼마 되지 않는 재산(재산이랄 수도 없는 정도지만)은 너희 두 사람에게 남긴다.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갖고 서로 도우며 지내기 바란다. 너희들이 나를 괴롭혔던 일은 모두가 옛일, 용서한 지 오래다. 나의 동생 카알, 최근 네가 나에게 보여 준 후의에 대해서 각별히 고맙게 생각한다. 너희들이 나보다 더 행복하게, 근심 없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너희들 자녀에게는 덕성을 길러 주도록 힘써라.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직 덕성일 뿐, 결코 돈이 아니다···. 내 경험에서 우러나와 얘기하는 거다. 그 덕성이야말로 역경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었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 것도 예술과 함께 그 덕성 덕이었다.

잘 있거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모든 벗들, 특히 리히놉스키 후작과 슈미트 교수에게 감사한다. 리히놉스키 후작한테서 받은 악기는 너희 중 한 사람이 보관해 다오. 그 때문에 다투어서는 안 된다. 허나 더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면 팔아 써도 좋다. 죽어서라도 너희에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랴.

죽음이 언제 오든 나는 기꺼이 맞을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예술적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동안은 설령 내 운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죽고 싶지 않다. (내 재능이 충분히 꽃필 때까지) 삶을 지속하고 싶다. 허나 (죽음이 예상 밖으로 일찍 찾아오더라도) 기꺼이 죽으리라. 그러면 끝이 없는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죽음이여, 언제든 오라. 나는 당당히 네 앞으로 가 너를 맞으리라. 잘 있거라. 죽은 다음에도 잊지 말아다오. 그럴 만한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의 행복을 염원하면서···.

자, 그러면 부디 행복해 다오.

하일리겐슈타트, 1802년 10월 6일
루드비히 반 베토벤

이것으로 너희들과 이별이다. 이를 데 없이 슬프다. 지금까지 품고 있던 한 가닥의 희망, 어느 정도는 회복하리라는 희망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가을 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시들듯 모든 희망은 퇴색해 간다. 이승에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 모습으로 이제는 떠난다. 시원한 여름날··· 나에게 샘솟던 용기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오오 신이여, 단 하루라도 나에게 순수한 환희를 맛보게 해주오···. 참다운 환희가 내 가슴 깊이 울리던 때 그 얼마나 오래인가. 오오, 언제 또다시 자연과 인간의 전당에서 그 순수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단 말인가? 오오... 그것은 너무나 잔혹하다.

하일리겐슈타트, 1802년 10월 10일
루드비히 반 베토벤   


베토벤이 살아 생전 유서를 남길 정도로 괴로워했던 장소, 하지만  이 곳은 비엔나 시내에서 벗어난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니 작은 뜰이 있는 건물에 베토벤이라고 써 있는 간판이 보인다.


베토벤이 유서를 썼던 하일리겐슈트의 살았던 집


베토벤이 살았던 집인데도 불구하고, 방문하는 곳마다 무척 한적했다. 음악 팬에게는 성지순례와 같은 곳인데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크게 흥미요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비엔나 시내에 음악가들이 살던 집이 너무 많아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쨋거나 혼자서 편안하고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점은 편리했다.


베토벤이 쓴 유서


베토벤 음악을 선택해서 들어볼 수 있는 공간
베토벤의 두상


이 곳에서 유서 외에도 특별히 시선을 끈 물건은 베토벤의 머리카락이었다. 음악가의 머리카락을 보는 것은 모차르트 뮤지엄에서 이미 보았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모차르트보다 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니 베토벤의 인생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생전에 베토벤은 본인이 겪었던 수많은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밝히고자 사후에 부검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인이 장례식때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 보관했던 것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베토벤의 머리카락
악필로 유명한 베토벤의 악보
베토벤의 데스마스크. 이전에 본 데스마스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베토벤의 초상화


베토벤이 살았던 집 밖에 보여지는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다. 베토벤은 이 창밖을 내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음을 느낄정도의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을 우리에게 선물해주었던 베토벤, 그의 음악은 영원한 감동으로 남을 것이다.


유서 번역문은 세상의 모든지식(2007. 6. 25., 서해문집)  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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