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척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보리차인줄 알고 맥주를 마신적이 있었다.
"우엑, 아우 써. 이런 걸 왜 마시지?"
맥주의 쓴 맛은 얼굴을 지푸리게 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더 웃고 떠드는 모습은 즐거워보였다. 어른들만 마시게 되어있는 술의 맛이 쓰다니, 쓴 맛은 마치 어른의 전유물인것 같았다. 일부러 쓴 맛을 찾을 필요가 없는데 쓴 맛의 어떤 매력에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일까. 혹시 쓴 맛 이상의 어른들만 알 수 있는 또 다른 미각이 있는 것일까. 쓴 음식은 내게 맛이 없었다. 맛있는 걸로 가득한 세상에 쓴 맛은 일종의 돌연변이, 바이러스, 원래 존재하면 안 되는 맛처럼 느껴졌다. 음식이 타면 쓴 맛이 난다. 탄 음식은 잘못 만들어진 실패한 음식이다. 쓴 맛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로 술이 함께 나오는 자리에서는 보리차와 맥주를 구분하기 위해 마시기 전에 조심스럽게 거품의 흔적을 찾아보곤 했다. 쓴 맛은 내게 어른의 맛이었다. 엄마가 애들은 마시면 안된다고 하시던 커피, 아빠가 좋아하시는 보약, 할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인삼도 모두 쓴 맛이었다. 술은 금지의 음식이었지만 쓴 맛을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린시절 모든 금지된 것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쓴 맛은 예외였다.
성인이 된 후 마시게 된 맥주의 맛은 여전히 썼다. 하지만 맥주는 쓴 맛 외에도 복합적인 맛을 갖고 있었다. 하얀 거품이 주는 부드러운 맛, 적당한 떫음과 신 맛, 시원한 청량감, 황금 빛 고매한 맛. 어쨋거나 단순히 '쓰다'라는 정의를 상쇄시킬만큼 맥주는 맥주만의 맛이 있었다. 쓴 맛은 맛 자체로는 맛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맥주처럼 복합적인 다른 요소와 어우러질 때 다른 어떤 맛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정제된 맛이 있다. 달콤한 매력도, 매운 맛이나 신 맛처럼 아주 자극적이지도 않은, 차분하면서도 진중한 맛이다. 혹은 에스프레소처럼 순수한 본연의 맛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타면 달고 부드럽고 맛있어진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커피의 맛이 아니다. 커피만의 향과 맛은 모든 커피의 베이스가 되는 에스프레소 그 자체에 모두 담겨있다.
쓴 맛은 우리가 가장 나중에 즐기게 되는 맛이다. 인생을 비유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맛도 쓴 맛이다. 인생의 쓴 맛을 맛봐야만 비로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쓴 맛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지 않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라는 말처럼 고통에 대한 인내는 좋은 결과를 만든다. 세상일이 쉽지 않고 어려움도 많지만 참고 견디면 또 다른 희망을 만날 수 있다. 어른의 쓴 맛, 아니 인생의 쓴 맛은 순간적이기보다는 연속적이다. 쓰디 쓴 경험을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고 더 좋은 날들에 대한 자양분으로 받아들인다. 기왕 쓴 맛이라면 희망에 기대어 꿈꾸어 보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어린 시절에는 먹고 사는 행위 자체가 기쁨이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어떻게 먹고 살것인지가 문제이다. 아 인생 참 쓰다, 써. 하지만 당위정처럼 달콤한 껍데기 이면의 본질과의 만남이라면 쓴 맛도 효용력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쓴 맛을 알게되며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