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과 사람, 이야기 하나

수필

by 조정호

"이번에 우리 가이드가 부족해서 한 명 뽑으려고 해. 앤드류라고 몇 년 알던 동생이야. 너 보다 3살 많던가? 일단 몇 달 일 좀 시켜 보려고..."


현실적인 직업으로 그랜드 캐년 투어 가이드를 시작한 지 약 2년이 되었을 무렵, 투어를 끝내고 도착한 차고지에서 회사 사장인 저스틴 형을 만났다. 속을 태우며 말을 꺼내는 그는 늘어진 어깨를 쇠기둥에 기댔다. 휴식이 필요한 것일까?


"음... 그 친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좀 그렇긴 한데, 일은 열심히 할 거야. 스미스 사장네 회사에 몸 담고 있는 아직 초보 가이드야. 근데 대부분 메인 가이드 샘이 일을 하고, 앤드류는 두 달 동안 딱 6번밖에 투어를 못했대. 일을 더 하고 싶은데 그쪽에선 콜을 받기 힘들 것 같아서 우리 회사로 오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사람 빼오는 건 상도에 어긋나니, 깔끔하고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오면 받아주겠다 했어."


그는 평소 신중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담배 연기와 뒤섞인 근심을 무겁게 뿜어내는 어조로 미루어 보아 한 달은 고민했을 것이다. 지금 내쉬는 염려가 공중으로 흩날리는 담배 연기 같이 산산이 부서졌으면 좋겠다. 그와는 회사의 구상부터 함께 하기 시작해서 출범 3개월 만에 1박 2일 분야에 업계 1위가 되었을 만큼 쉬지 않고 달렸다. 현장에서 투어를 진행하는 가이드로서 회사를 관리하는 수장으로서 우리 모두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정직하기도 했기에 매출 대비 이윤이 다른 회사에 비교해 현저히 적었다. 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업계 최고 연봉을 받고 있는 나 보다 수입이 적었으므로, 회사가 커지고 그가 돈을 더 벌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고민이 살갗에 땀으로 맺혔다. 10월에도 사막 다움을 잃지 않은 베가스답게 아직 남아 있는 아스팔트의 열기가 바람에 실려 몸에 감긴다. 먼지는 피부를 움켜쥐고 놓을 줄 몰랐다. 같은 이름을 가진 안 좋은 기억의 사람이 떠올라 뺨과 팔을 툭툭 털어냈지만 찐득거리는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앤드류... 앤디... 형, 혹시 그 사람 전에 핸더슨에서 스시 셰프로 일 했던 사람인가? 어떻게 생겼지?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어서... 나 보다 2~3살 많았거든요."

"언제, 어디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시 했었어. 너 보다 좀 크고 더 말랐지. 피부색이 갈색에 가깝지 아마? 왜? 뭔 일 있어?"

"누구나 다 앤디고 앤드류니까. 뭐 워낙 흔한 이름이긴 한데... 옛날에 아는 동생의 지인이라 일하는 가게에 몇 번 갔었거든요. 근데 같이 간 사람 중 한 명이 좀 순하고 어리숙하니까 시종일관 괄시하더라고. 남을 깔보는 눈빛, 실룩이며 추켜올리는 입꼬리, 신경을 건드리는 말본새... 아직도 기억나네. 동생들 두 명 빼곤 다 모르는 사람들이라 가만히 있었는데, 불쾌했고 참기 힘들었죠. 그 사람 나 보다 좀 컸고, 말랐지. 안경 안 썼고... 피부색은 모르겠네. 설마 똑같은 사람 아니겠지? 만약 그 사람이면, 형님 전 죽어도 반대입니다."

"안경은 안 썼는데 성격이 내가 아는 앤드류랑 많이 다른데... 아마 아닐 거야. 그래야겠지?"

"그래요. 똑같은 이름은 많으니까요. 아니어야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앤드류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염려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대화 중 뭔가 성에 차지 않으면 퉁명 부리며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이소룡 같은 표정을 지었다. 코미디 연극의 주인공 역을 자처한 그와 쉽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일본산 고급차를 끌며 괜찮은 콘도미니엄에 살고 있어도 으스대지 않는 편안함을 주었다. LA에 있는 아는 딜러에게 프로모션 기간에 무이자로 샀다고 자랑하며, 차를 바꿀 때가 된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생활의 지혜를 전혀 모르고 살아왔고 관심도 별로 없기에, 특정 분야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고 한편으론 '참 힘들게 산다' 싶기도 했다. 여태껏 필요하면 사고, 필요 없으면 안 사고, 필요한데 돈이 없으면 못 사고, 안 필요한데 사고 싶으면 몇 달이나 몇 년 고민하고, 쓸만하거나 고칠 수 있으면 안 바꾸거나 고치고, 망가지면 바꾸며 지내왔다. 별의별 이득을 보는 방법론을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다. 어쩌면 슬기로움과 피곤함은 동의어일 수도 있겠다.


베가스에선 도통 내리지 않는 눈이 애리조나에 막막하게 쌓이는 계절, 어김없이 차량 정비소에 들렸다. 수박색이 예뻤던 2,800불을 주고 데려온 '간자'라고 부르던 첫차가 죽고, 학생 때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2,500불로 산 두 번째 차를 '엘란'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엘란이도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는지 두 달에 세 번은 말썽을 일으켰다. 샥에 문제가 생겨 들린 단골가게 정비소에서 사장님이 꼼꼼히 차를 보시다 낮은 한숨을 여러 번 쉬신다.


"이제 보내주시죠. 이미 너무 오래 타셨어요. 지금 이 차의 가치가 500~1000불 정도 되나요? 쭉 보니 몇 달안에 고장 날 것들이 수두룩 빽빽하네요. 차 값보다 부품값이 더 많이 나오겠어요. 저번에 카탈리틱 컨버터 문제 생겨서 교체할 때도 750불 들었으니 차 값만큼 나왔었죠? 에어컨 냉매 가스도 채워드렸는데 일주일 만에 다 떨어졌잖아요. 그거 어딘가 새는 거거든요. 찾기도 쉽지 않고, 찾아도 교체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라디에이터도 망가져서 엔진 늘러 붙을 뻔했죠? 그리고 또 뭐 있었죠? 하여간 엄청 많았잖아요. 타면 탈 수록 손해예요. 진작에 폐차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차예요."


엘란이의 사망선고를 직접 듣는 것은 막연히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가슴을 후비는 강도가 사뭇 달랐다. 저녁 약속 후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힘들다고 툴툴거리는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동네의 Arbors Tennis & Paly Park으로 향했다. Far Hills Ave를 가로질러 Tree Top Park까지 연결되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음악과 글을 구상할 때 항상 녀석이 기다리던 곳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안아주는 햇살이 녀석에게도 같은 몸짓으로 온도를 나눠줄 것이다. 시동을 끄니 거친 숨을 고르듯 위잉 거린다. 차에서 내려 연석에 앉아 가만히 녀석을 눈에 넣었다. 지긋지긋한 애리조나의 폭설이 녀석을 덮친 것일까? 똥차라고 골렸던 것이 아팠던 것일까? 본연의 색을 알기 힘들 정도로 벗겨진 페인트와 이곳저곳 찌그러져 깊게 파인 상처가 눈 안에서 껄끄럽게 굴러다닌다. 검은 페인트의 차가 회색과 흰색이 섞인 삼색 얼룩 바둑이로 변하는 시간 동안 함께 해왔다.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린 아내를 바라볼 때도 이렇게 두 눈이 따끔거릴까? 그 눈은 아름답게 세월을 피운 눈꽃일까 아니면 삶에 한파가 내리친 것일까? 그때의 표정도 지금과 같을까? 녀석을 두 번이나 도둑맞을 뻔했는데, 어디 가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서 곁을 지켜주었다. 함께 달리던 숱한 추억을 유난히 하얀 담배 연기로 그려보았다.


'많이 힘들었니? 아픈 몸으로 무리하느라 고생했구나. 더 아껴줬어야 했는데... 엘란아, 그동안 꿈을 실어 날아줘서 고마웠어.'


안쓰럽게 핀 노을을 공원에 남겨두고 자동차 딜러 샾에 도착하니 어느새 하늘은 온통 남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딜러와 상의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신차를 받을 수 있었다. 한동안 집 앞에는 엘란이와 '티파니'라고 이름 지어준 새 차가 함께 서 있었다. 예전에 간자가 폐차장으로 끌려가던 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무리 시동키를 돌려도 대꾸를 않던 느닷없는 침묵이 숨소리마저 앗아갔다. 잘 헤어지는 방법을 몰랐던 사춘기 시절이 다시 찾아왔고, 오래도록 그리움을 뒤적거렸다. 엘란이를 쉽게 보내지 못했던 건 이별할 때 느끼는 아픔이 싫기도 했지만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참기 힘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DMV에 차량 등록을 말소시키고 소장하고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니면 수리를 해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선물을 하는 게 고철더미가 되어 사늘한 폐차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엘란이 그리고 차를 받는 그 누군가도 행복하겠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수리비 3,000불을 들여 기부한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며칠을 보내는 중 수화기를 통해 앤드류 형의 소식을 들었다.


"죠야. 너 앤드류 얘기 들었어?"

"왜요? 일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가끔 투어지에서 보면 잘하던데요?"

"그게 아니고... 와, 장난 아니다. 걔 차 엄청 싸게 샀잖아. 그거 페이먼트 몇 푼 되지도 않는데 그마저 못 내서 차 뺐았겼단다. 엔진오일도 안 갈아서 차가 썩었단다. 보험도 없이 다닌 것 같더라고. 그리고 빚이 무지 많다는데. 과거 커뮤니티 사이트에 돈 꾸고 안 갚는다고 실명까지 거론되며 난리도 아니었단다. 아직도 갚아야 되는 빚이 꽤 된다던데. 그리고 도박한다더라. 다 그거 때문이지 뭐. 카지노에서 살다시피 하는가 보더라고. 걔 어쩔라 그러냐."


세계적인 도박 도시 라스 베가스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등록금을 고스란히 카지노에 헌납하고 한국으로 끌려가는 친구들을 여럿 봐왔다. 한화 1억 원을 날렸다는 이야기 따위는 흥미조차 없었다. 도박으로 망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노가다를 뛰며 친해졌던 동갑내기 친구 선규가 떠올랐다.


"선규야. 전공 뭐 할지 결정했어? 난 TCA가 재밌는 것 같아서 그쪽으로 가려고 해. 일단 200 단위 듣고 있어. 보통 F&B 많이 하던데, 너는?"

"어, 나 gaming management 하게... 카지노!"


기껏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도박 전공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 욕을 하며 그를 나무라고 있으니 소년 만화에나 나올법한 수심에 찬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낸다.


"전공 이름이 game이잖아. 배우는 것도 game이고... 근데 정작 카지노 가서 game 하는 사람들을 gamer가 아니고 gambler라고 하잖아. 오락과 도박은 분명히 다른데... 난 게임 산업을 공부해서 한국의 정선 카지노 같은 도박장을 건전한 게임장으로 만들고 싶어."


그의 열정은 교정을 달구던 땡볕보다 뜨거웠으며, 이상은 바르게 솟은 야자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어려운 것인지, 숭고한 듯 보였던 그의 꿈은 도박을 갈망하는 마음을 교묘히 감추기 위한 포장지일 뿐이었고, 겉치장의 가벼움만큼 쉽사리 벗겨졌다. 흡연도 하지 않던 그는 늘 카지노 특유의 담배 전 내를 묻히고 다녔다. 그를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했지만, 학교를 다니며 막일을 하고 여자 친구 연서가 사는 캘리포니아를 왕복하며 결혼과 편입을 고민하느라 바빴기에, 다분히 친구로서 가지는 형식적인 걱정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겨울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가 사귀던 친구와 결혼을 하고 베가스에 신혼집을 차렸다. 친구 부부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했다고 한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달아오른 그들의 두 볼은 벽난로에 피어오른 불과 수줍게 닮아있었다. 이들의 애틋함이 꾸준하기를 바랐다. 자신들 외에는 연고가 없는 미국에서 가정을 지키며 삶을 개척하기엔 아직 어린 듯 한 20대 중후반의 남편과 아내가 마주할 실수가 설렘보다 많을지 모르겠지만, 만나 왔던 기간만큼 앞으로도 한결같다면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 뒤로 차려입은 코트의 무게를 더위가 벗겨냈고, 이내 불어온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지만, 단추를 풀어서 금세 다시 찾아온 봄바람을 맞이해야 했다. 기침과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4월에 날리던 꽃가루가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잔뜩 들어와 있다는 것을 선규와 나는 알지 못했다. 헌팅턴 비치의 파도를 머금은 윤슬 같이 잔잔하게 빛나던 연서의 미소는 캘리포니아보다 3음절이나 짧아진 뉴욕이라는 글자만큼 허망해졌고, 그녀보다 3시간 늦게 잠들어야 하는 아득한 2,500 마일의 도로 위에 잡히지 않는 선율들을 적어 나갔다. 술 한잔 사달라던 선규는 이미 취해 있었으며, 이혼했다는 한 마디를 소주잔 안에 떨어트렸다. 그의 말이 녹아든 술을 입에 털어 넣는 것 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는 뒷모습을 남기며 가로등이 꺼진 어두운 아파트 단지로 빨려 들어갔다. 더 이상 그날 그 집을 밝히던 벽난로를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그때 보았던 벽난로는 친구 부부가 흘린 눈물로 차갑게 식었으며, 한숨에 날린 재로 목이 메케해졌다.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하지 않은 것, 그리고 하지 못한 것들이 선규의 그늘에 숨어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듯 좌시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멍들어갔다. 검은 반점이 커 갈수록 음악으로 사랑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아갔다. 또한 음악이나 글 같은 추상적인 위로도 좋지만, 현실적인 도움이나 제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앤드류 형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마음속에 선규가 흘려 놓은 눈물 자국을 닦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란이를 고치거나 소장하는 것이 나에겐 손해겠지만, 앤드류 형은 차가 있다면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다. 투어를 한 번만 갔다 오면 샥을 바꿀 수 있을 것이고, 한 두 달 버티면 중고차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주위 형들에게 그에게 차를 주겠다고 하자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


"죠야, 네 마음은 좋은데... 도박쟁이들... 그 새끼들은 사람 새끼들이 아니야! 그거 정신병이야. 네가 도와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나중에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너 우습게 보고 돈 뜯어내려고 하거나, 지금 당장 고맙다고 해도 나중에 '똥차를 줬네. 사람을 무시하네.' 하면서 네 욕하고 다닐걸? 네가 준 차 때문에 사고 났다고 물어내라고 할 수도 있어. 내가 도박쟁이들을 한 두 명 봤냐. 그냥 그런 놈들이랑은 상종을 안 하는 게 맞아. 차 줘봐라. 나중에 어떤 일 생기나. 후회할 짓 하지 마! 그냥 무시해! 지 인생 지가 사는 거지. 지가 자진해서 병신 같이 사는 거 네가 왜 도와줘? 네가 마더 테레사야? 평생 도박 끊지도 못할 거 그냥 병신 같이 살게 내버려 두어. 그러다 병신 같이 뒤지라 그래. 씨팔 놈들! 내가 도박쟁이 새끼들한테 당한 것만 생각하면 아주 그냥 이가 갈려."


형들의 말을 들으며, 여러 사람이 떠올랐다. 선규와 친했던 한 사람은 학교 등록금을 포함해 한화 총 3억 원을 도박에 탕진했었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날 까지도 카지노에서 받은 compensation으로 호텔 스윗 룸에 묵었다.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술과 음식을 룸서비스 한도에 꽉 맞춰 시키고 헛된 기세를 부렸다. 예전 룸메이트 역시 학비와 차를 판 돈 1억 원을 모조리 카지노에 봉헌하고 부모님 몰래 휴학했다. 또, 은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던 어느 형은 도박하는 꼴을 보지 못한 부모님에게 잡혀 한국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탈출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었다. 자기는 절대 잃는 법이 없다며 카지노에서 딴 돈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쓰고 수업료를 댄다던 친구는 불과 한 학기만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 위로 앤드류 형의 이소룡 같은 표정을 그려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터벅거리던 선규도 떠올랐다. 그날 선규와 마시던 소주를 갑자기 들이켰는지 취기가 올라온다. 현기증을 유발하는 그들의 기괴하게 일그러진 꼴이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를 연상케 했다. 씁쓸한 맛을 혀로 느끼는 것인지 마음이 언짢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생각만 해도 이렇게 거북한데 깔깔한 그 뒷맛을 또 한 번 다시고 싶지 않았다.


차를 받으러 앤드류 형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리저리 엘란이를 살펴보더니 지금 상황에 이런 차라도 가질 수 있는 게 어디냐고 반긴다. 감사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에 무게가 느껴졌다. 예사로운 대답 대신 고마웠던 녀석이니 부디 아껴달라는 말에 작은 미소를 얹었다. 엘란이와 이별하는 순간을 아주 느리게 눈에 넣고 싶었지만, 그가 시동을 걸고 150m 앞의 왼쪽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시간의 초침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돌아갔다. 처음 녀석을 만났던 순간부터 오늘까지, 긴 세월 속으로 스며든 기억을 털어낼 수 있도록 헤어짐의 인사를 건넬 틈도 없었다. 그저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 허무함만이 빈자리에 남겨졌다. 휑뎅그렁한 자리에 반지름 1.5m 정도의 원을 그리며 연신 빙글빙글 돌았다. 썩 많은 상념을 조심스레 한 꺼풀씩 벗겨내듯 중심 잡기 힘들 정도의 느린 걸음으로 도로를 밟았다. 이윽고 곡선을 더 넓혀가며 서서히 녀석을 등사해갔다. 가로등이 더 밝게 느껴질 때 즈음, 연이어 만든 수십 바퀴의 동그라미를 따라서 어질러진 생각과 추억을 차곡차곡 얽어매야만 했다.


하나둘씩 별무리가 모여가는 5월, 회사 소유의 별장 지붕 위에는 애리조나의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이 쌓여가고 있었다. 저스틴 형은 별저를 관리하기 위해 올라와 있었고, 앤드류 형과 나는 투어 일정이 겹쳤다. 마지막 일정인 별 보기와 캠프 파이어까지 끝났다. 우리는 당구대가 있는 리빙 룸에서 예의를 지키기 위한 몸가짐 따위는 전혀 상관치 않고 몸의 기울기와 손과 발 그리고 하루의 피로를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둔 채 널브러졌고, 손님들은 다이닝 룸에 모였다. 그들은 15명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목 식탁 위에 여행 이야기와 학교 혹은 회사 생활, 주식이나 재테크, 또는 연애 등 각자의 흥밋거리를 마음 가는 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감탄사가 튀어나올 때는 지붕에 올라앉은 별똥별이 들썩이며 춤을 출 정도로 하나가 되어 소리를 모았다. 이 정도라면 밴드에서 보컬을 해도 좋을 목청이었다. 호흡, 분위기, 속도를 보면 펑크락이 잘 어울릴 듯싶다. 신명 나는 그들의 합창을 듣기 위해 근처를 뛰어다니던 사막 토끼가 멈칫하고 귀를 쫑긋 세울지도 모르겠다. 15명의 보컬리스트에게 그 장르에 잘 어울리는 닭 볏 머리를 씌어준다면 제법 그럴듯하겠다. 각각 2명씩 한 가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해서 총 14개의 무지개 빛깔을 만든다면 더욱 멋있을 것이다. 색이 하나 부족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도 흥분하며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이 똘똘 뭉친 그들은 지금 무척이나 행복하다. 자신들의 너털웃음이 가이드에게는 환호성으로 들리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앤드류 형은 즐거운 노랫소리를 헤집고 들어와 목소리로 귀에 못을 박는다.


"아니, 그래서 사진 찍는데 갑자기 확 하더라고. 깜짝 놀랐지! 장난 아니었어!"


이소룡이 닭 볏 머리를 하고 있었다. 부족했던 색도 찾았다. 그가 다이닝 룸에 있다면 완벽한 조합이었을 것이다. 그는 투어 중 일어났던 사소한 사건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조리 풀어내고 있었다. 이제 일이 손에 붙고 재미있어진 모양이었다. 도박을 하지 않고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데, 버팔로의 뜀박질이 숨 막히듯 조여온다는 그가 빠져있는 슬롯머신이 얼마나 사람을 홀리게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자기 말 이외의 것은 필요 없다는 듯 그는 끊임없는 망치질로 빠끔히 내민 생각을 틀어막았다.


"진짜 미쳤다니까! 거기 어디야. '자이언 캐년' '천국의 문'에서 말이야."


천국의 문이라는 생소한 말에 저스틴 형과 서로 시선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


"형, 천국의 문? 그게 뭐지?"


"아, 왜, 있잖아. 자이언 캐년 들어가면 터널 나오기 전에 맨날 사진 찍는 구멍 뚫리다 말은 곳. 설명할 때 여기는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아니고 천국의 문이니까 지우 히메는 잊으라 하면 빵 터진다고 저번 회사에서 내 사수였던 샘 형이 팁이라고 알려줬는데...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너도 맨날 사진 찍잖아."


"the Great Arch 말하는 거야?"


"응? 그건 뭔데?"


"형! 거기 공식 명칭이 the Great Arch야. 별명이 천국의 문일지는 모르겠는데 난 처음 들어봤어. 가이드라면 정확한 정보를 먼저 주고 별칭을 이야기해 줘야지."


잘못 알고 있는 이름을 잡아주고 습득하고 있는 여행지의 지식과 정보량이 미심쩍어 이어서 여러 가지 물어보았지만 거의 알지 못했다. 그 뒤로 그를 만나면 여행지에 대한 역사, 인물, 유래 등 가이드로서 꼭 알고 있어야 하거나 여행객들이 물어볼 만한 것들의 중요 단어만 집어 툭툭 던져 주었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예상대로 스스로 찾아가며 공부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 뿐 아니라 가이드들 사이에서도 여행지에 해박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누군가 그는 아는 것이 많다고 칭찬을 하면 눈가의 주름이 기분 좋게 슬며시 접혀 버리곤 했다.


6월에는 많은 것들이 움직인다. 태양은 더 많은 빛을 지상으로 옮기고, 위에서 부터 아래로 땀도 흐른다. 나뭇잎들은 연한 연두색을 버리고 점점 진하게 물들며 녹색으로 바뀌어 간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여행객들도 부쩍 분주해진다. 앤드류 형은 콘도미니엄을 떠나 회사에 고문 격으로 계시는 아버지 연배인 큰 형님의 누나 부부 댁으로 싼 값에 방을 하나 빌려 머물게 되었다. 형의 부탁으로 잠시 들린 옛 집에서 그의 룸메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차와 로봇을 좋아하는 성향이 맞아 종종 쿵작이 맞는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앤드류 형이 지냈던 방에 남겨진 그의 자취에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붙인다.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론 몇 달치나 방세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룸메이트와 몸 부딪히며 살면 감정이 틀어지고 싸우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어떻게 행동하고 생활했으면 '형은 정말 개새끼구나.'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박이 문제란 걸 알면서도, 몇 달 일을 했으면 어지간한 빚은 충분히 갚을 수 있었고 집값이 밀릴 리도 없었기에, 화투조차 치지 못하는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뙤약볕을 반사하는 드넓은 대지 위에 여기저기 아지랑이를 피우고 수다스럽게 들끓는다. 아른거리는 풍문을 헤치고 그는 분주하게 투어를 나가며 옷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해질이 풍부한 체액은 좋은 가이드로 성장할 충분한 수분이 되었고, 이미 거멓게 그을린 피부가 그의 노력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지금 모습을 가을까지 간직한다면 뜨거운 공기에 실려 둥실 떠오른 썩 많은 말을 입김으로 불어대던 사람들의 흥미도 잦아 들것이다. 하늘거리며 날아다니던 버팔로는 추수기에 냅다 동댕이쳐지어 매가리 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이고, 무참히 휘몰아치는 애리조나의 겨울 대설에 의해서 뻐끔거리지도 못한 채 암흑 속에 처박혔다 숨통이 끊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백질 가득한 버팔로 고기를 먹고 정신을 탄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근육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엉뚱한 표정을 짓는 그의 즐거운 연극은 계속되어야 했다. 음악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오래전에 알았지만 눈물로든 웃음으로든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는 믿음을 진리로 여기고 작업하며 살았다. 내 것으로 감싸주고 싶지만, 그게 욕심이라면, 남의 것으로도 괜찮았다. 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와 보여주고픈 장소가 있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차고에서 곤히 자고 있던 티파니를 깨웠다. 눈동자를 비비며 부릉하고 대답한다. 그의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 반갑게 맞이하는 엘란이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차 옆 자리에 그를 태웠다. 해를 서쪽으로 멀찌감치 밀어내고 있는 보드라운 햇살을 티파니가 온몸으로 부딪쳐 끌어안는다. 못 내린 여름 소나기를 대신해서 선루프에서 쏟아지는 빛은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몸을 적셔간다. 곧 빛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고는 콧등에서 코끝으로 미끄러져 열매를 맺는다. 플라스틱 아이스커피 컵에 싱그럽게 여문 물방울은 광원으로 수채화를 그린다. 멀어지는 해를 부지런히 쫓아 베가스 끝자락에 도착했다. 레드락 캐년이 양쪽 눈의 가장자리에 그득하다. 하늘 가득 펼쳐진 노란 도화지에 협곡의 열정이 송골송골 매달려 타들어간다. 그대로 불꽃 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렁그렁한 배기음이 길 위에 촘촘히 발자국을 찍으며 따라붙는다. 사방에서 폭죽이 터진다.


Far Hills Ave 언덕에 위치한 소방서를 지나 차를 세웠다. 자연스러운 어둠과 인위적인 가로등의 밝음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정차를 하기 위해 킨 비상등과 오른편 가등이 껌뻑이는 박자가 제각각이다. 10년 전 엘란이와 힘겹게 오른 바로 앞 고개는 하늘의 컴컴함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그 길은 쉽게 정복당하지 않겠다고 틀림없이 콧대를 치켜들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기 거슬리지 않게 차 안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멈추었다. 소음기를 거치지 않은 직관 통 머플러에서 나오는 소리가 1분에 120회 정도의 속도로 적막 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와 나는 어느 정도의 심박수를 가지고 살아왔을까. 그에게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때의 나를 그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진심은 정말 닿을 수 있는 것인가.


"형, 여기 10년 전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야. 그때 6개월 간 작업한 노래 수 십 개가 거짓말 같이 한 순간에 날아갔어. 뮤직 비디오도 완성된 상태였거든. 반년 간의 삶이 사라져 버린 거야.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억울했고 믿기질 않았지. 한 3개월 그지 꼴로 살았나? 빛 조차 못 새어 들어오게 암막 커튼을 꽉 닫고 살았어. 식물이 전혀 자라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칠흑 같은 그림자가 잔뜩 드리운 듯했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인지 정신인지 모르겠는데 뭔가 분리돼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어. 아른거리는 검은 물체가 스멀스멀 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더니 내가 나한테 말을 걸더라고. 내가 아닌데 나인 거와 텔레파시 같은 거로 대화하는 게 정말 끔찍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겠더라고. 정신병이 이런 거구나 싶었지. 그렇게 그 해 겨울을 보냈어.


그리고 3월 초중반이었나? 커튼을 비집고 창틀 가장자리에서 빛이 묘하게 새어 들어오는 거야. 이상하잖아. 방 안에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암막 커튼이 얼마나 무거운데 흔들릴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걸 보니 이것도 정신병인가 싶더라고. 순간 분노가 폭발해서 '이건 뭐야!' 소리 지르며 커튼을 잡아 뜯듯 열어재꼈지. 그랬더니 빛이 한순간에 터지는 거야. 돌발적인 섬광이 아주 강렬한 하얀색인데 가생이가 옅은 노란색이었던 것 같아. 눈이 멀었지. 극히 짧은 그 시간이 기다림 보다 더 길게 느껴지더라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니 폴폴 날리는 먼지가 빛을 한 아름 먹은 모양이 수만 개의 보석이 동실동실 떠다니는 것 같더라고. 창틀엔 햇살이 살포시 앉고는 생긋 웃으며 '안녕'하고 인사하는 거야. 그때부터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서 먼지가 뱅뱅 돌며 조금씩 떨어지는데 긴 꼬리를 가진 유성우였어. 서서히 몸을 감싸며 적시더라고. 그래서 유성비라고도 하고 meteo shower라고도 하나 봐. 무질서하게 흩뿌려진 별똥별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얼었어.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더라고. 바닥에 뿌려진 보석을 밟고 방을 나서서 현관문을 여니까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3월의 햇빛이 어깨에 올라타선 제법 따뜻하더라고. 폐 속을 잔뜩 채운 공기엔 겨울 흔적이 애잔하게 남아있었어.


아이스크림을 사니까 드라이브가 하고 싶더라고. 그때 Summerlin에 Lake Mead Blvd 쪽에 살았거든. 거기 언덕이 가파르잖아. 암만 액셀을 밟아도 엘란이가 안 나가는 거야. 시간이 좀 지나고 탄력을 받으니 답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는데, 교차로 신호등에 빨간불이 딱 들어오네. 급정거를 할 수밖에 없었지. 열 받더라고. 음악도 삶도 뜻대로 안 되는데 운전을 해도 마찬가지로 앞을 가로막고 가지 마라고 하니까. 라디오를 켰어. 아니 그냥 켜진 것 같아. 3개월 간 음악을 만들지도 듣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눌렀나 봐. 그랬더니 'Cold Play'의 'Fix You'가 나오네. 그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거든. 울면 지는 거 같으니까. 이 꽉 물고 참았거든. 근데 정면 서쪽 하늘에 서럽게 번진 노을이 가슴으로 훅 파고들더니 갑자기 눈물이 뿜어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 그거 알아? 정말 섧게 울면 눈물보다 콧물이 더 많이 나오는 거? 눈물 콧물 섞여 범벅이 됐지, 아이스크림은 녹아서 손에서 뚝뚝 흘러내리지, 신호등은 파란불로 바뀌었는데 출발도 못하고 있으니 뒤 차들은 빵빵 거리지. 그때 내 모습은 분명 추했을 거야. 누가 봤다면 평생 놀림감이지. 그다음엔 기억이 안 나.


그리고 도착한 곳이 여기야. 지금이랑 시간이 비슷해. 이 언덕을 보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었어. 왜 반항하는 느낌 있잖아. 가파른 언덕과 빨간 신호등은 현실인 거고 그게 날 못 올라가게 하니까 대들고 싶은 거 말이야. 엘란이를 최대한 풀 가속시켰지. 역시 안 나가더라고. 어찌나 강파른지. 겨우겨우 빌빌거리고 꼭대기에 도착했어. 차에서 내려서 담배에 불 붙이고 뒤돌아 봤는데 말문이 턱 막히는 거야. 베가스가 저 멀리 보이고, 개미보다 100배나 더 작을 것 같은 사람들이 셀 수 없는 빛들로 먹지에 흐드러지게 아크릴 물감을 뿌려 놨더라고. 기분이 오묘하더라. 예쁘다고도 느꼈고, 참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많은 빛 중에 왜 내 것 하나 없을까 싶기도 했고. 어렸을 땐 세상 모든 빛이 다 내 것이 될 것만 같았는데. 그리고 그냥 그렇게 내려왔어. 내려올 땐 어떤 감정이었는지 잘 모르겠어. 복잡했겠지. 단지 그 후로 운전을 사랑하게 됐고, 오르막을 오르는 게 좋아졌어.


가끔 여기 올라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가곤 했어. 마리화나가 불법이던 시절, 베가스 환상을 보는 건지 떨 피다 경찰에 걸리는 애들부터 차에서 그 짓하는 놈들까지 봤어. 트럭으로 오프로드 뛰는 사람도 있더라고. 이곳에서 어머니의 전화도 받았어. '이왕 음악 하며 살기로 작정했으면 우리 아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시더라고. 항상 음악과 글은 내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라 생각해 왔는데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더라고. 하고 싶은 말을 음악과 글로 지으며 살고 스스로 위로받는 나도 사람이잖아. 혼자만 좋았던 걸 같이 나누면 참 근사하겠더라고. 그날은 뚜렷한 명암의 차이로 그려진 베가스 유화 뒤로 동쪽에서 뜨는 큼지막한 보름달을 볼 때까지 무릎을 괴고 길에 앉아 있었어.


그러다 한번은 누가 드론을 날리고 있는 거야. 하얀색 몸통에 검은색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렸는데 말도 안 되게 하늘로 쫙 솟구치는 거야. 여기는 이미 엄청 높잖아. 거기서 더 올라가는 게 참 자유로워 보이더라고. 붉은 꼬리 매가 활강하는 높이에서 아주 작게 반짝 빛나더니 사라지더라고. 그 모습을 보는데 구름 한 점 없는 짙푸른 하늘에 'The Cinematic Orchestra'의 'To Build A Home'이 울려 퍼지는 거야. 보컬은 노래를 안 부르고 가사를 말하고 있었어. 'By the cracks of the skin I climbed to the top. I climbed the tree to see the world. When the gusts came around to blow me down, I held on as tightly as you held onto me.' 피아노의 크레셴도와 첼로의 스타카토가 피부를 사정없이 때리더라고. 누가 노래를 틀었겠어. 분명 상상이지. 이상하지? 오랜 시간 미국에서 홀로 기댈 곳 없이 살아왔잖아. 뭔가가 날 잡아준 걸까? 그리고 생각 들더라. 그깟 노래 다시 만들면 되는 거였는데 그땐 그게 삶의 전부였나 보구나 싶더라고. 그러고 나서 그토록 험난했던 이 고개가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냥 슉 밟으면 샥 나가더라고. 웃기지? 그게 차가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변한 걸까?"


그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숨만 쉬었다.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그의 심장 고동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는 달려야 했다. 겨우 주먹 만한 장기지만, 살아갈 수 있도록 동력 자원을 공급해 주는 심장에 있는 힘껏 산소를 밀어 넣어야 했다. 지금은 전속력을 선택하지만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굳이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득한 우주에서 소망이란 건 잡을 수 없다고 제 잘남만 뽐내며 깔보고 있는 별이란 놈의 높이까지, 상상의 굴레가 없는 이상을 띄우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꾸준히만 가면 느린 걸음도 상관없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다. 그저 혈기를 쓸데없이 소모하기 위해 자동차로 언덕을 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나와 작금의 그에게 결코 원치 않았지만 얻어 버린 현실을 꺾을 반기였다. 온 힘으로 부딪뜨리려는 건, 무엇을 위한 것이든, 한 번쯤은 모든 힘줄이 끊어질 때까지, 불구가 되거나 간절했던 것의 실체를 확인하거나, 당겨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솔린 화약이 터지는 여섯 개의 크랭크 엔진은 2 심방 2 심실에 증오와 희망까지 더한 심장이다. 3,000 cc의 검붉은 피로 물든 시트엔 비린내가 뜨겁게 저미었고 브레이크 캘리퍼에 뚝뚝 흘려놨다. 트윈 터보는 부서질 때까지 숨을 몰아붙이는 두 개의 폐다. 413 마력은 바람을 가르는 속도고, 350 파운드 토크는 땅이 꺼질 듯 박차는 힘이며, NISMO 배기는 목을 찢어발기며 울부짖는 함성이다. 20인치 광폭 타이어는 한 시간에 180마일을 달려도 버티는 신발이다. 3개의 컴퓨터로 작동하는 DAS 스티어링 휠은 전투기의 Fly by Wire와 설계가 똑같다. 어디로든 방향을 틀어줄 것이다. 등에서 돋아난 카본 스포일러는 한 없이 가벼운 날개다. 그것은 어렴풋한 추상이 아니고 확실한 은유였다. 듣고 읽어주는 이 없는 음악과 글에 삶을 허비하고 도박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생이 누군가에게 유치하고 지질한 한심한 놈들로 보일지라도, 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는 분명한 전우였다.


비상등을 끄고 아무도 달리지 않는 길로 느릿하게 차를 몰아 한가운데 다시 한번 정차했다. 운전 방식을 스포트 플러스로 바꿨다. 엔진과 기어의 반응이 24% 민첩해졌다. 전자식 감압 서스펜션은 중력에 저항하며 하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버틴다. 스티어링 휠은 일본도 같이 예리해졌다. 차량 자세 제어 장치는 끄지 않았다. 왼쪽은 중앙 분리대를 겸한 가로수가 있는 화단이고 비포장 벌판이 오른쪽에 있다. 양쪽 모두 함정인 좁은 직선 코스에서 최고 출력을 내기 위해선 컴퓨터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며칠 전 타이어 공기압을 알맞게 맞춰놨기에 차량 뒤꽁무니가 미끄러져 차선을 이탈할 확률은 낮을 것이다. 외부 기온은 화씨 76도로 괜찮다. 도시와 떨어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실제 온도보다 차게 느껴진다. 더 많은 산소를 포함한 높은 공기 밀도는 과급기를 통해 터보챠저로 들어갈 것이고 엔진은 큰 출력을 쓰기 수월할 것이다. 기어봉을 왼쪽으로 밀어 수동으로 넣고 1단이다. 오른발로 누르고 있던 브레이크를 왼발로 겹쳐 밟고 오른발을 떼었다. 떨어진 오른발은 그대로 엑셀레이터 위에 힘을 주지 않고 얹어 놓았다. 이제 한 박자 한 번, 반 박자 두 번씩 깜박이는 가로등의 마지막 반 박자가 끝나는 순간, 서서히 오른발에 힘을 주어 1/15만큼 액셀을 밟아 스로틀을 열고 RPM을 2,700 언저리까지 올린 후, 다시 한 번 가로등이 크게 눈을 감았다 뜨면, 왼발로 브레이크를 풀고 그대로 알루미늄 지지대에 단단히 고정하는 동시에, 오른발로 엑셀레이터를 지르밟으면 그만이다. 전조등 조작 지렛대를 앞으로 밀었다. 수평선을 함께 긋는 그와 나의 시선엔 도로에 꽂힌 상향 등이 어둠을 째려본다. 드디어 높은 콧등의 우뚝한 줄기를 가진 숨바꼭질하던 도로가 잡혔다. 이제, 저 고만(高慢)한 콧대를 부러트려 꺾어버릴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릴 순간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같은 속도로 흘려냈다. 준비는 끝났다.


껌뻑! 한 번의 짧은 시간이 지나간다. 깜빡... 다음 반박자를 기다린다. 급가속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깜빡. 부드럽게 발목을 기울여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RPM이 일정한 속도로 올라간다. 몸을 달궈가며 뛸 준비를 하는 엔진의 소리가 중저역대에서 고른 회전 질감에 얹혀 실내로 유입된다. 이윽고 음압을 높여가는 배기음과 진동 폭을 맞춰간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파형이 꽈배기를 틀며 그와 나를 옭아맨다. 차 안에 더 이상 소리가 찰 공간이 없자 금세 2,700 RPM에 도달한다. 가로등은 아직 눈을 뜰 생각이 없다. 이대로 브레이크를 떼면 최대 출력이 풀려난다. 상향 등이 닿는 곳 중간쯤 왼쪽에서 흐린 초상의 작은 물체가 기습적으로 날아든다. 틀림없는 박쥐일 것이다. 호젓한 산길을 두 동강 낸 그것이 시야의 오른쪽으로 사라지는 순간 가등이 크게 번쩍인다. 끔뻑! 신호탄이다! 양다리에 일시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무릎과 허벅지를 내리눌러 오른발로 가속페달을 때리고 왼발은 들어 올려 지지대를 박찬다. 몸은 시트로 빨려가고 안전벨트는 가슴을 죈다. 단거리를 빠르게 주파하기 위한 출발 가속이 시작됐다. 가랑가랑했던 엔진과 머플러의 소리가 카랑카랑해진다. 차의 뒤축이 눌리고 앞축이 들어 올려지며 시소를 탄다. 350 파운드의 힘이 두 개의 뒷 타이어에 온전히 실렸다. 터빈이 단단히 성질이 난 듯 크다랗게 두 개의 콧구멍을 열어젖혀 꽉 차도록 가득 산소를 들이키며 터보를 터트린다. 3,000 RPM이란 뜻이다. 그때 달갑지 않은 고주파의 서늘한 비명이 차창을 찢고 고막을 뚫는다. 타이어가 헛돌고 있다. 차량 자세 제어 장치의 점멸등이 타코미터 안에서 정신 사납게 번쩍인다. 출력에 족쇄가 걸렸다. 힘을 강제로 제어당하고 있다. 반면, 5,000 RPM에 도달해도 티파니는 여전히 도로를 강물 삼아 느긋하게 물고기 유영을 한다. 답답함에 목이 멜 때 타이어가 도로를 움켜쥐었다. 출력을 꽁꽁 싸맨 쇠사슬이 깨졌다. 탈출이다. 드디어 오만한 표정으로 호락호락하게 우리를 얕잡아 보던 이 놈을 물고 늘어질 수 있다. 스트레이트 펀치가 날아간다. 훅이나 어퍼컷 같이 쩨쩨하게 돌아가는 수단이나 방법 따위는 내팽개쳤다. 6,700 RPM이다. 4개의 오른 손가락으로 패들 쉬프트를 당겨 쳤다. 레드존은 7,000 RPM부터 시작이지만 더 빨리 가기 위해서 때론 힘을 비축해야 할 때도 있다. 시트가 등을 후려치고는 다시 잡아챈다. 기어는 2단, 분당 엔진 회전율 6,800번, 시속 50마일이다. 1.2초 전 오른손으로 했던 행동을 퓨얼 컷이 걸리기 전에 한번 더 되풀이한다. 기어 변속 충격도 타의적으로 반추된다.


기어비가 올라가며 속도도 따라간다. 어느새 출력은 토크보다 마력을 더 쓰게 되었다. 413 마력을 뒷바퀴 두 개에 모조리 쏟아내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지금 그와 달리는 자동차 안의 이 작은 공간에는 우리의 숨소리마저 집어삼킨 괭음만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것들에게 소음을 묻히고 있다. 바람, 나무, 잡초, 자갈, 모래, 하늘과 땅, 어딘가에는 있는 구름과 별 그리고 태양과 달,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동물과 곤충도 있겠고, 누군가 버린 꽁초도 있을 것이다. 그래, 살아오면서 참 많은 것을 만나고 지나왔지. 숱한 인연 속에 난 어떤 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그 소리는 과연 듣기 좋은 음악이었을까? 기어는 5단이고, 회전 수는 6천이며, 속도는 125마일이다. 더 달리고 싶다. 아직 힘이 있으니, 그래... 조금만 더 뛰자. 현재 날 삼킨 이 큰 소리에 숨어있는 내 소리가 어떤지 찾아서 들어보자. 멀리 있는 언덕길, Far Hills Ave,에 상향 등을 켜고 꼭대기를 오르듯 음악이든 글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 됐던 그것에 닿는 길이 아득히 먼 거리라도 할 수 있는 만큼 가보자.


끝이 보인다. 타코미터의 바늘은 140마일을 가리킨다. 앞으로 달린다는 건 그만큼 뒤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똑똑하고 현명하지 못해서 무엇을 바라보며 가고 어떤 것과 멀어졌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그저 좋아하는 것을 향해 미련스럽게라도 걸어갈 힘과 의지가 내게 있으면 좋겠다. 도덕이란 것도 집단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뿐임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해 놓은 올바르게 사는 규범으로 그를 재고 싶지 않다. 단지 어떤 식으로든 그가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뭔가를 찾길 바란다. 과속을 하고 있다면 멈추는 것도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른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왼손으로 패들 쉬프트를 당겨 엔진으로도 제동을 걸었다. 브레이크 혼자만의 힘으로 충분히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깨금발로 서는 것보다 사이좋은 양다리로 땅을 딛고 싶었을 뿐이다.


마지막 한 그루의 가로수를 끼고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변함없는 그림이 제자리에 걸려있다. 10년간 항상 똑같은 그림이었다. 물론 자세히 보면 상당히 바뀌었지만 이렇게 먼 장소에서는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는다. 새어 나온 그의 날숨이 발 밑으로 떨어진다. 추락한 위치가 아무리 낮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저곳 보다 높다. 이상의 키가 이렇게 크다는 걸 또한 더 높이 띄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달린 길을 따라 올라온 바람이 앞 머리카락을 들어 올린다. 이 바람은 누구의 숨을 실어 왔을까. 언덕의 꼭짓점에 그의 시간이 모인다.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한껏 폐를 부풀려 쉬는 그의 숨결이 흐른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티파니가 'Lucia'의 '부디'를 노래한다.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던 바람이 반대로 방향을 틀어 그의 등으로 노랫말을 실어 나른다. 연인 간의 사랑 노래가 다른 의미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그는 지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 살짝 그의 어깨가 불규칙적으로 흔들린다. 넘쳐나는 빛이 그의 어깨 위에서 불안하게 파도를 탄다. 훗날 어깨가 들썩이며 저 빛이 춤을 출 날도 있겠지.


'지금, 이 언덕이... 형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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