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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장정리 Jun 15. 2019

비 오는 날

 아무래도 비라면 시원한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실금 걸린 중년 가장의 눈물처럼 추적추적 구슬프게 떨어지는 것보다는 천둥번개와 함께 세상이 끝장날 분위기로 쏟아지는 비를 좋아합니다. 그런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낮인데도 잔뜩 어두운 하늘과 귀를 먹먹하게 하는 빗소리가 묘한 흥분과 함께 아늑한 기분을 선사합니다. 

어렸을 적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평소와 다른 어두운 풍경에 신나 오늘은 수업이 빨리 끝나지 않을까 하는 헛된 망상 속에 등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비가 오는 날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가 정전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지루한 수업 도중 갑자기 주위가 암전 되면 아이들은 정신 나간 원숭이들처럼 끽끽거리며 날뛰었습니다. 흥분한 아이들은 점잖게 수업을 진행하려는 선생님께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한 선생님은 곤란해하시면서도 정말이지 정말로 말도 안 되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셨고, 나는 2차 성징이 발현되는 나이에 그만 실례를 할 뻔했습니다. 지나치게 무서웠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예전에는 빗소리를 비가 오는 날에만 들을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문명의 발달로 비가 오든 오지 않든 비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비 오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검색을 해 보니 유튜브에 빗소리를 녹화해둔 영상이 있었습니다. 조회수가 꽤나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비 오는 소리를 나 혼자만 좋아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채널을 발견한 후,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 혹은 일을 할 때 비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녹음된 빗소리를 들으면 회사가 아니라 저 멀리 외딴 숲속에서 덩그러니 비를 맞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런데 그 영상에 누군가가 비 오는 소리가 아니라 삼겹살 굽는 소리 같다고 쓴 댓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나는 빗소리 유튜브를 들을 때마다 자꾸만 삼겹살 굽는 소리로 들려 눈을 꽉 감고 삼겹살집으로 달려가야만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자식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사실 녹음된 빗소리도 좋습니다만, 아무리 음질이 좋다고 해도 실제로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귀 먹먹한 빗소리와 묵직한 천둥소리, 그리고 아직도 어둑한 창밖을 보면 세상이 순식간에 좁아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것도 내 손에 닿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이 어둡고 나른한 다섯 평 다락방처럼 축소됩니다. 축소된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린 시절, 비가 오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비를 감상했습니다. 베란다로 의자를 들고나간다든지, 산책을 나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때는 시원하게 비를 맞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일부러 나가서 맞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비를 좋아하지만 그만큼 나의 머리카락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비를 맞다가 머리가 벗겨지면 사람들은 나를 갓파로 오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실제로 고삼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비를 맞으러 나갔는데, 장마 기간 새빨간 노을 아래서 생쥐 꼴로 동네 다리를 배회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른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은 나른하고 아늑하지만, 자꾸 비 내리는 걸 구경하다 보면 꽤나 쿨한 느낌도 듭니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저 구름에서 땅으로 반복적으로 떨어지는 게 뭔가, '그냥 그런 거지'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영화 주인공들이 멋진 장면에서 비를 맞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쉽게도 요즘 들어 그렇게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별로 만나 본 기억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비가 내렸지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아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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