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비싼 선물이라도 진심어린 편지를 받는 기쁨에 비할 수 있을까요? 물론 굉장히 비싸고 값진 보물이라면 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건은, 그것이 한창 때의 비트코인이나 하이닉스 주식 같은 것이 아니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되고 낡아 가치가 깎여나갑니다. 다만 편지만은 예외입니다.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선물이지만, 편지의 진정한 힘은 시간과 함께 발휘됩니다. 종종 똑같은 간장계란밥을 하루종일 먹어 오장육부가 무료할 때면 오래 전에 받았던 편지 뭉치를 꺼내 봅니다. 과거의 친구들이 생일때 써 주었던 편지, 졸업 전 롤링 페이퍼, 군인 때 받았던 편지, 옛 연애편지들에는 과거의 나도 있고, 과거의 그 사람도 있고, 우리의 관계도 있습니다. 낡은 종이에 번진 잉크로 쓰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나는 그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추억합니다. 그 곳은 분명히 거쳐 온 시간들이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먹먹한 시절입니다.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해주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들의 나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나의 타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해준다는 점에서 마음이 담긴 편지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시간을 접어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념일에 가장 좋은 선물이라며 편지만 준다면 척추가 접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계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 두 눈으로 담겠어 하고 무시했지만 나중에 앨범을 뒤적이다 보니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추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특히 그 중에서도 연애에서 남는 건 어쩌면 편지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간직하고 있는 편지는 모두 반쪽짜리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보낸 편지는 읽어볼 수 있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보냈던 편지는 읽을 수 없습니다. 편지 속에 담긴 상대방이 기억하는 우리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모습은 침침한 기억을 더듬어 흐릿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이 편지에 답장으로 무슨 말을 썼는지, 혹은 내가 어떤 편지를 썼길래 이런 답장이 왔는지는 사라진 퍼즐조각처럼 허전합니다.
그렇다고 옛 애인들에게 찾아가서 혹시 내가 준 편지를 가지고 있니? 내 놔. 하는 식의 접근방법을 사용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쪽에서도 원한다면, 그리고 그 편지들이 잿더미가 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한 번 교환식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편지가 아닌 목숨을 교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