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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는 중입니다.

by 아리라

대망의 수학능력시험이 끝나던 날, 딸아이를 마중 나가서 기다리는 동안 비가 내렸다. 그래도 올해는 수능 한파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많은 부모들이나 지인들이 교문 앞에서, 오래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이 시험을 치르는 교실이 가장 늦게 끝나는 것 같았다. 시험장을 나오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도 때론 무겁기도 해 보였다. 이번 영어시험을 만점을 맞았다는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그날따라 나이 들어 조금은 어두워진 내 귀에 어떤 안테나를 세운 건가 싶을 정도로 남의 이야기가 잘 들려왔다. 결과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하자고 했지만 결과가 좋아서 딸이 기뻐할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 틈에 섞여 딸도 걸어 나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드디어 끝이 난 순간이었다. 10시간 동안 교실에 갇혀 숱한 걱정과 염려와 한탄과 불안들을 모두 이겨내고 걸어 나오는 학생들이 모두 대견해 보였다. 나는 딸을 꼭 안아주었다. 집에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가는 딸이 새삼 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했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나의 생활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되도록 사람들이 많이 모일만한 장소에 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이 있으면 꼭 마스크를 끼고 나갔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수능이 2주 정도 남았을 때 내가 감기에 걸린 일이 있었다. 아픈 일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딸에게는 감기가 옮지 않았다. 감기 기운이 살짝 나타나자마자 병원을 가고 약을 열심히 먹은 덕분에 크게 아프지 않고 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주 마시지 않지만 가끔 즐기는 맥주 타임을 갖지 않았다. 지인과의 약속도 되도록 시험이 끝난 후로 미뤘다. 집에 와서 딸이 공부를 하면 나도 옆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시험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고 힘들어할 때 안아주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우리는 딸이 가고 싶어 하던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딸은 하이볼을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딸은 재수생이라 이미 성인이었는데 자신의 주민등록증검사를 하지 않는 것에 뾰로통했다.


“너 어른이야. 다 알만하니까 하지 않는 거겠지. 벌써 나이 들어 보여서 슬픈 거야?

“나 아직 애긴데…”

“그렇지. 너는 내겐 늘 애기지.”


딸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님을 아쉬워하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이 서글프기도 한, 어정쩡한 시간대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시기가 사춘기보다 더 파도가 일렁이는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어른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하이볼과 맥주를 마시며 수능이라는 대단원의 막이 내린 것을 안도하며 축하했다.


다음 날 우리는 막바지 가을의 정취를 찾아 전등사에 갔다. 시험 전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발길이 닿지 않았었다. 올해는 높은 기온으로 단풍이 꽤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가을 전등사를 늦지 않게 보고 싶어서, 전날 밤을 새웠다는 딸을 기어이 데리고 나왔다. 전등사 입구에서 만난 나무는 그야말로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을의 색은 강렬하다. 모든 할 일을 다 마쳤다는 표식일 것이다. 험난한 시험을 마친 학생들의 수고가 저 나무에서 함께 빛이 나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전등사로 입장했다. 늦가을의 정취로 가득한 전등사의 풍경을 새길 수 있었다. 어렸을 적 교회에 다녔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산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절에 가면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낀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자연의 경치 속에 놓여있으면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전등사에 다녀온 날 밤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그다음 날 아침은 겨울처럼 추워졌기 때문에 전 날 다녀오길 잘했다고 스스로 만족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어제 전등사에 가지 않았다면 올해의 가을로 가득했던 전등사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시기적절한 때를 놓치면 다시 맞이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딸은 작년 수능의 기회를 놓쳤다. 여러 가지로 몸과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시 힘겨운 1년의 시기를 지나 올해 드디어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다시 다가온 시기에 무사히 수능을 치를 수 있게 되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수능이라는 시험은 딸이 꼭 끝마쳐야만 하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험을 끝마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시험의 결과는 그동안 공부하면서 나온 모의고사보다는 조금 더 좋게 나왔지만 딸이 만족할 점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기뻤다. 딸이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면서 얻은 소중한 성취였기에 그 무엇보다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엄마, 나 이렇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지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억압된 마음은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불안하고 편치 않게 만들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이 드는 것은 그동안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꼭 해야만 하는 생활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꼭 이루어야 하고, 거기에 맞는 성적을 내야만 하는 것.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이 압박에 힘들었을지 마음이 아려왔다.


“이런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을 거야. 그러니 마음껏 누리렴.”


이렇게 말을 해주면 그나마 조금은 편안한 표정이 되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나 역시도 긴장의 끈이 갑자기 끊어진 탓인지 수능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아프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아파왔다. 소화도 되지 않았고, 머리도 아프고, 온몸의 뼈마디가 다 아파왔다.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는 걸 보면 정신적인 영향이 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먼저 아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먼저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없던 배앓이는 신경정신과 선생님과 상담 후 약을 처방받아먹으니 곧 좋아졌다. 나는 수없이 괜찮다고 되뇌었지만, 그동안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좋아지고 나니 드디어 딸이 아프기 시작했다. 감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3주쯤 앓고도 깨끗하게 낫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아프고 나니 더욱 실감이 났다. 우리에게 어떤 큰 시험이 끝났다는 것을.



이제 또 다른 시험이 우리 앞에 닥쳐올 것이다. 인생은 늘 고난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산을 오를 때는 힘이 들지만 내려오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무릎과 허리에 힘을 주고 주의 깊게 내려오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리고 다가올 다른 산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 산은 생각보다 낮을 수도 있고 의외로 그 전의 산보다 험하고 높을 수도 있다.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몸과 마음의 힘을 비축해 두면 다음의 여정이 조금은 수월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산에서 내려오는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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