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딸이 나에게 처음 책 읽어주던 날
“우리 아이는 지식을 전달하는 책만 보려고 해요.”
“맞아요. 스토리가 있는 책들보다 지식 전달하는 학습만화만 찾아요.”
“이제 만화책을 못 읽게 해야 할까요?”
며칠 전 카페에서 필사를 하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 앉은 엄마들의 대화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마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들의 엄마일 것이리라. 우리 아이가 어렸을 적 나 역시 엄마들과 함께 나눴던 고민이기도 했으니까. 지금도 아이들은 비슷한 패턴으로 성장하고 있나 보다. 요즘은 학습 만화가 더 다양해졌을 테니 아이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다양한 책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마음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던 게 생각이 난다. 예쁜 그림이 있는 부분을 펼쳐서 마치 미술관처럼 꾸며 보기도 했고, 일부러 학습만화책은 구입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둑학원에서 오후 내 시간을 보내는 딸은 쉬는 시간마다 학습만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읽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헛웃음이 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책 읽기에 대한 나의 미흡했던 대처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좀 더 자유롭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연령에 맞게 들여줘야 한다는 전집 위주로 준비해 주고 그 틀 안에서 책을 읽으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던 것이다. 조금 더 자주 도서관에 가서 아이의 선택으로 책을 읽혔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보다 도서관 이용이 많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된다. 편협했던 내 사고방식이 조금 더 유연했더라면. 이런 끝도 없는 되새김질이 오래오래 이어지고 있다. 요즘 들어 가장 아쉬운 부분은 너무 일찍 책 읽어 주기를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아이가 한글을 일찍 익히고 나니 혼자서 책을 잘 읽게 된 것을 반갑게 생각했고, 그만큼 내가 책 읽어주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림책은 그나마 글밥이 적어서 읽어주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어린이 명작 같은, 스토리가 있고 호흡이 긴 책들은 읽어주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내가 지쳐 있을 때 책을 갖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면 “이젠 ○○이 읽을 수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볼래?” 이런 식으로 거절하곤 했었다.
초등학교 방과 후에 딸은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오는 날이 많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학원을 많이 보내지 않아서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고, 딸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책을 고를 수 있어서 좋았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니 학습 만화책을 보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어느 때인가부터는 학습 만화책도 구비해 주었다. 주말이면 부천 만화박물관에 가서 딸은 실컷 만화책을 읽곤 했다. 나와 남편도 어렸을 적 만화를 좋아했고 쉬는 날이면 만화책을 대여해서 방바닥에 쌓아놓고 하루 종일 읽곤 했었다. 지금은 만화책 대여소는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만화카페라는 더욱 업그레이드된 문화 공간이 차지하고 있다. 아직 만화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전에 우리는 만화카페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다른 도시의 만화카페를 몇 군데 탐방한 후 우리만의 만화카페 공간을 완성했다. 그렇지 않아도 학습 만화를 주로 읽던 딸은 이제 진짜 만화책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나는 딸의 나이에 맞게 일정한 틀을 정하여 그 구간에 속한 만화책만 읽도록 허락하였다. 한창 많은 책을 접할 나이에 하필이면 그 자리를 만화책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바쁜 엄마의 빈 공간도 만화책이 많이 채워주었을 것이다.
카페에서 엄마들이 나눈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때의 나 역시도 많이 고민했었던 부분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만화책과 일반책과의 비율을 늘 아쉬워했었다. 그렇다고 일반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독서의 시간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었던 그 시기에 만화책으로 많은 부분이 채워졌단 사실이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틈틈이 내가 읽고 좋았던 책들을 딸에게 권하기도 하고 가끔은 책 내용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너 좁은문 읽어 봤니? 내 인생책 리스트에 있는 책인데.”
“엄마, 인간실격 읽어봤어? 내가 읽어 봤는데 좋더라.”
“엄마가 저번에 사 온 연금술사 너도 한번 읽어 볼래?”
어느덧 스무 살이 된 딸은 이제 마음껏 책을 골라서 볼 자유가 있다. 딸과 나는 이런 대화를 종종 나누곤 한다. 그리고 서로의 인생 책 리스트를 묻고 대답하기도 하고, 그 책들의 어떤 면이 좋았는지 서로 나누곤 한다. 만화책으로 점철되었던 그 시절을 지나왔지만 딸은 딸의 방식대로 고등학생 시절에도 틈날 때 책을 읽었었던 모양이다. 기특했다. 엄마들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아이들은 만화책 시절을 지나 좀 더 확장하여 책 읽기를 스스로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습만화든 그냥 만화책이든 활자로 된 책을 가까이하고 읽는다는 것 자체로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주책스럽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긴 하다. 내가 독서의 영역이 그리 넓지 않아서 딸에게도 그 영향이 어느 정도 이어졌을 것이다. 좀 더 까다로운 분야의 책들은 아직 도전해보지 못한 영역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책의 영역을 조금 다양하게 접하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나와 딸은 어떻게 하면 잠이 잘 올 수 있을지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곤 했다. 요즘은 유튜브를 켜면 온갖 잠이 잘 온다는 콘텐츠들이 넘쳐났다.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영역의 과학이야기를 듣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라는 조언을 듣고, 어느 날 밤 미지의 우주까지 날아간 적도 있었다. 잠이 쉽게 온다면 이 세상 수면제들은 다 쓸모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딸이 나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는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보통 그런 영화(나는 책 보다 영화로 접했다)는 학교에서 보여줬을 법도 한데, 학교에서는 한 번도 틀어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자주 접하게 된 제목의 책 내용이 궁금했나 보다. 읽어달라고 하길래 전자책으로 된 책을 기꺼이 읽어주기 시작했다. 나도 책 내용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우리의 키팅 선생님이 등장할 무렵쯤 목도 칼칼하고, 잠도 오고 읽던 걸 멈추고 서로 잠을 청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책 읽어주는 것이 좋았나 보다. 나도 오랜만에 책을 읽어주니 감회가 새로웠다. 며칠이 지나고 딸이 물었다
“엄마 내가 이방인 읽어줄까?”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살짝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딸이 그 책을 읽고 좋았다는 말에, 그래 어디 한번 들어볼까? 하며 딸이 읽어주는 이방인을 밤마다 조금씩 듣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난생처음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깜깜한 밤에 잠을 청하고 있는 그 시간, 그 기분, 그 묘한 낯섦과 기대와 흥분으로 뒤섞인,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한 첫 이방인을 말이다. 딸의 입에서 나오는 책 속의 말들이 어두운 천장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펼쳐지고, 한 장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장면이 불쑥 들어와 서로 뒤죽박죽 되었다가, 다시 새롭게 바다가 펼쳐지고, 늙은 개의 모습이 떠오르고, 주인공 ‘뫼르소’의 얼굴이 어쩐 일인지 잘생겼으리라 상상하게 되고야 마는 이 마법 같은 시간을 말이다.
나는 딸이 읽어주는 이방인에 그야말로 쏙 빠져버렸다. 혹시나 누군가 읽어주는 것이 그만큼 다 좋은 것인가 싶어 밀리의 서재 한 달 무료이용권을 이용하여 AI가 읽어주는 버전으로, 셀럽이나 성우가 읽어주는 버전으로 책을 들어보았다. 성우버전이 좋긴 했지만 딸이 바로 옆에서 읽어주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책을 읽어주는 동안 딸과 나는 같이 서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주고받기도 하고, 대사를 읽어줄 때면 자못 진지한 연기를 해주기도 하며, 어이없는 장면에서는 서로 깔깔대며 웃곤 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책 읽어주기의 핵심인 것이었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오늘은 이방인 안 읽어 줄 거야?”라며 요청하기도 했다. 정말 낯설고도 멋진 경험이었으나 곧 나의 머리를 후벼 파며 들어오는 깨달음으로 고통스러웠다. 왜 나는 어린 딸에게 책 읽어주는 것을 그리도 일찍 멈춰 버렸을까.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이 너무도 안타까워 마음이 몹시 아팠다. 내가 이토록 생생한 느낌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힘듦을 감수하고라도 밤이 되면 딸에게 스토리가 있는 여러 가지 동화책을 읽어 주었으리라.
나는 그날 카페에서 나눈 엄마들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끼어들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학습 만화든 그냥 만화든 아이에게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게 좋겠다는 것. 그리고 스토리 있는 책을 아이들이 읽지 않으려 한다면 자기 전 혹은 언제든, 엄마의 목소리로 읽어 주길 권한다고. 하루에 많은 양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렇다면 아이는 더욱 호기심을 갖게 될 테니까. 그다음 이야기가 알고 싶어서 기대를 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것은 엄마와 아이가 나누는 아주 특별한 교감이 될 것이다. 엄마의 목소리를 통해서 상상의 세계를 펼치고 장면을 그리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모습일지. 되도록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아이들이 나처럼 이렇게 요청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전 책 읽어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