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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라 Nov 13. 2024

나의 꿈은 시인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꿈이라는 것이 하늘을 바라는 이상향 같은 것일 때는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꿈이 너무 높은 이상적인 것이라서, 혹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면 이 질문에 절망적인 생각에 잠길 수도 있다. 나는 그 점에 있어서는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내 꿈은 시인입니다.” 

열네 살,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 가진 꿈 이자 지금까지 품어온 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시인이 되었을까? 


꿈을 말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에게 꿈이 너무 높은 이상향이 되었을 때부터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시인이 꿈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점점 부끄러워졌다. 꿈이 없다고 말하는 게 싫을 때는 “시인이 되는 것이었지”라고 애써 과거형으로 대답해 버린다. 마치 이제는 그 꿈엔 미련이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꿈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날은 이유 없이 아픈 하루가 되곤 했다. 


시인이 되고 싶은 이유가 처음엔 국어 선생님을 많이 흠모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에겐 그분이 풍기는 깊이 있는, 어떤 고뇌의 시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픔을 통과하고 어느 정도 삶을 통달한 정취 같은 것이 그 어린 나이에도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온 길이 궁금해지곤 했다. 한 시간 이상의 거리를 걸어서 가야 하는 소풍길에 은근히, 선생님의 느리지만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에 맞춰서 걸어 보기도 했었다. 


“선생님, 지금 결혼하신 분이 첫사랑인가요?”

소풍이 주는 들뜬 기분이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던질 용기도 주곤 했다. 

“아니야. 첫사랑은 그냥 끝이 났어.” 

선생님도 소풍이라는 어떤 정취에 이끌린 것인지 사랑의 끝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겐 하나의 드라마 같은 멋진 사랑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선생님의 표정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은 표정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날 유난히 쓸쓸해 보였던 선생님의 뒷모습만 기억 속에 남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책에 실린 시들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린 시에 대한 해석을 그리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느꼈었다. 시를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시를 읽고 그 시에 대해서 평을 하고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무렵,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다른 시를 직접 적어서 우리에게 나눠 주고 낭독해 주었다. 나는 후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그날의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시는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었다. 외국의 시는 번역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르지만, 그날 내가 접했던 그 시는 아름다운 길이 있었고 조금 서글프게 마무리된 시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읽게 된 그 시에서 그때의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했다. 선생님은 어느 순간 국어선생님이라는 길을 선택했겠지. 선생님 앞에 다른 길도 놓여 있었겠지. 아마도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겠지. 나 역시 그랬던 것처럼. 


그 시를 계기로 나는 본격적으로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도 참 멋있었고 시인들의 아름답고, 강하고, 슬픈 감정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감탄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다른 시를 접하려면 시내에 있는 서점에 가야만 했다. 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쯤 걸리는 서점에 가서 시인들의 다른 시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때는 교과서에서 접한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읽는 것으로도 벅찬 시절이었다. 


나는 조용히 기도하듯 읊조리는 한용운 시인을 만났고, 천재라고 불리는 이상 시인의 이상하지만 재미있는 시들도 접했다. 그리고 반듯한 청년 같이 단정하고 청량한 모습의 윤동주 시인과, 그를 꼭 빼닮은 그의 시를 만났다. 나는 한동안 윤동주 시인의 사진을 오려서 지갑에 넣고 다닌 적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시집에서 만난 윤동주 시인은 지금까지도 나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의 <별 헤는 밤>을 수도 없이 마음속에 새기면서 시골 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 국어 선생님은 가끔 어디선가 주최하는 백일장 대회 소식을 틈틈이 알려줬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백일장 대회에 나가 시를 쓰곤 했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내가 쓴 시의 전부였다. 


시인의 꿈은 고등학생 시절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의 아웃사이더 기질이 고등학교 시절 시와 마주하면서 더욱 폭발하게 되었다. 나는 학교의 천편일률적인 수업과 공부보다는 학교 밖 시 동아리 모임에 더 열심이었다. 지역 고등학교 연합 시 동아리를 어떤 계기로 알게 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시를 써서 가지고 가면 서로 돌아가면서 낭독도 하고, 시에 대한 이야기도 서로 나눴다. 그때의 시들은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시였겠지만 얼마나 순수하고 맑았을지는 상상 속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그동안 써왔던 시들을 모아 시화전을 하는 행사가 있었다. 우리들은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모여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시를 그 위에 적어 넣었다. 그때는 졸업했던 동아리 선배들도 찾아와 우리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마치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시화전을 앞두고 용기를 내어 국어선생님께 시화전 초대장을 보냈다. 내가 좋아했던 시의 시인이 우리 지역 시인인 것을 알고 그 시인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시였을 텐데. 시 제목이 <청소부 아저씨>였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아침 보충수업을 들으려면 7시 50분까지 학교에 가야 했는데, 겨울철이면 학교에 가는 길이 어둑어둑한 새벽길이었다. 그때 청소를 하던 청소부 아저씨를 보고 쓴 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시는 쓸만한 게 없어서 그 시 하나만 전시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화전 당일, 멀리서 큰 키의 국어선생님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시인을 꿈꾸던 그리 잘나지 못한 제자의 시화전을 보러 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초청장을 보낸 지역 시인의 모습도 보였었다. 


지금은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또렷하지 않게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 그토록 확고했던 내 꿈이 있었던 시절, 나는 빛이 났었던 것 같다. 비록 이렇다 할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고, 아웃사이더처럼 혹은 이방인처럼 매일매일 낯선 기분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그때 시와 함께했던 시간만큼은 즐겁고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 


“너의 꿈은 무엇이야?”라는 질문은 이제,

“너는 어느 과를 선택할 거야?”라는 질문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무런 고민 없이 나는 “국문학과”라는 단답식 대답만 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을 만났을 때,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만났을 때, 그때부터 나는 꿈이 시인이었고 당연히 국문학과를 가겠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었다

몸이 하나이기에. 한참을 서서

한쪽 길을 따라 되도록 멀리 바라보았다

길이 덤불 속으로 휘어지는 곳까지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1연>


살다 보면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몸이 하나이기에. 두 길이 다 궁금하고, 가보고 싶고, 알고 싶은 길일 수 있다. 이런 선택의 앞에 서서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는 시기가 내게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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