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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징 Jun 29. 2023

빈 문서 공포증

미루고 미루다 겨우 쓴다

230424



하기 싫은 일을 하루 종일 미뤘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진 지 오래. 이젠 정말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화면 가득 빈 문서를 띄우긴 했는데, 이번엔 너무 화면이 하얘서 못하겠다. 나에겐 아무래도 나도 몰랐던 흰색 공포증이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것 말고는 딱히 무서운 흰색이 떠오르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흰 화면이 너무 무서웠으므로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마실 것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텀블러에 얼음을 채워 넣다 보니 평소에 정리도 잘 하지 않던 식탁이며 싱크대가 더러워 보여 거기에 손을 또 대고... 그러고보니 운동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 거실에 버티고 서있는 사이클을 한 번 쳐다봤다가... 요즘 책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아 사놓고 읽지도 않던 책을 꺼내들고...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깜빡 졸았다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몇 시간이 또 지났다. 이제 정말 진짜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쓰고 있다. 최종적으로 제출하는 것이 이 글이 될지는 미래의 내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런데 아직도 하얀색이 너무 많네. 무서운데.      


웹 소설 작가인 나는 글 쓰는 게 일이다. 그러나 요즘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사실 일을 하겠다고 손에 쥐고 있긴 한데, 쥐고만 있을 뿐 마음은 콩밭이다. 웹 소설 원고가 진행이 안 되니 요즘 다니고 있는 에세이 학원 숙제라도 하자고 이러고 있는 건데, 수업 시간에는 청산유수처럼 잘 써지던 것이 왜 집에선 안 되나. 기가 막힌 일이다. 집이 터가 안 좋은가?      


웹 소설 원고는 사실 빈 문서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열심히 한 글자 한 글자 밟아 만든 소설의 한 장면이 화면을 어느 정도 채우고 있으니, 이건 빈 문서 공포증과는 관계가 없다. 현재의 나는 그저 그 장면의 다음 장면을 이어주기만 하면 된다. ‘주인공이 일하는 현장에서 전 애인을 마주친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뻔뻔하게 주인공을 대한다!’는 장면까지 썼는데 이 둘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한 채 흐른 시간이 벌써 며칠째인지.      


아무래도 글의 진행이 이상한 것 같아서 앞부분을 뜯어 고쳐보기도 하고 뒷부분을 날려보기도 하고 대사도 수없이 수정해 보았지만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처음 구상했던 장면으로 돌아간다. 역시 근본부터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이걸 왜 쓴다고 했지? 애초에 계약이 잘못된 거다. 난 작가가 적성에 안 맞나 보다. 아. 라면 먹고 싶네. 가장 중요한 일에서 또다시 회피하기 시작한 머리는 자꾸만 이상한 곳으로 구르고 굴러 잡념만 한 솥단지 몰고 온다.      


그렇게 또 멍하니 시간을 허비하다가 이번엔 숙제를 하겠다고 빈 문서를 다시 켰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머리 대신 손가락 첫 마디가 사고 기능을 전수 받은 듯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열심히 구른다. 머리엔 빈 문서가 무서우니 뭐라도 채워놔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수업 시간에 배운 걸 적용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래 놓으니 또 분량을 제법 채웠다. 아무래도 내 뇌는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 끝에 있었는지도.      


역시 일단 하면 되는구나. 마감이라는 산을 간신히 넘을 때마다 얻는 교훈을 오늘도 얻어간다. 사실 빈 문서가 두려울 때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긴 하다. 아무 소리나 일단 갈겨보는 것. 쓰는 게 아니라 갈기는 것이다. ‘*나 하기 싫다 미친.’ 이런 말이라도 좋다. 그렇게 빈 문서를 빈 문서가 아니게 만들면 손가락이 드디어 자신이 두들겨야 하는 것은 책상과 내 이마빡이 아니라 키보드였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하듯 뭔가가 써진다. 고치는 건 미래의 내가 마침내 머리를 굴려 가며 할 일이니, 그쪽에 떠넘기면 된다.      


생각해 보면 내가 미뤄온 모든 것이 그렇다. 쌓여있는 빨래도, 설거지도, 스케일링도. 일단 세탁기 앞에 서면 어떻게든 빨래는 하게 되어 있고, 일단 고무장갑을 껴야만 설거지를 할 수 있으며, 일단 치과에 전화해야 스케일링을 받을 수 있다. 해야 할 일은 태산 같고, 그 앞에서 내 머리는 돌덩이처럼 꽉 막혀 있어도, 그것을 움직일 마중물은 사실 한 바가지 정도면 충분하다. 그 뒤엔 지금껏 잘 학습시켜왔던 몸뚱이가 알아서 움직여 줄 것이다.      


그렇게 밀린 일을 해치우고 나면 뿌듯함이 남는다. 그땐 ‘하. 이것 봐라. 나도 어른이다.’하고 우쭐대도 좋다. 그래. 나도 알아. 안다고! 그런데 바가지가 너무 무겁다고!      


어쨌든 난 오늘도 이렇게 밀린 일을 하나 시원하게 완수해냈다. 잠시 이 뿌듯함을 즐기겠다. 그리고 다시 텀블러를 채우고 괜히 스트레칭도 한 번 하고, 쓰레기를 버릴 때가 됐나 쓰레기통도 열어보고, 그리움을 가득 담아 침대도 한 번 바라봐 준 뒤, 의자에 다시 앉아야 한다. 이젠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주인공과 그의 전 애인을 어떻게든 해야만 할 때다. 이만큼 써줬으면 좀 알아서 움직이면 안 되니? 언제까지 내가 다 챙겨줘야 해? 너희도 이제 어른이잖아! 그나저나 치과 예약해야 하는데... 아. 또 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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