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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징 Jun 28. 2023

오늘은 또 뭘 먹나

1인 가구의 채소 챙겨먹기 

230613




냉장고에 토마토가 쌓였다. 어지간하면 내 손으로 사지 않는 채소 중 하나인데, 채소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니 내 손으론 고르지 않았을 채소들이 하나둘 냉장고에 자리를 잡는다. 서둘러 소진해야 할 텐데, 그냥 먹기는 싫고 대단한 요리를 하기도 귀찮다. 그렇다고 썩힐 수는 없지. 이참에 당근까지 처리해야겠다. 당근이야말로 있어도 골라내는 나의 극불호 채소인데, 이것 역시 채소 구독 서비스가 선물해 준 놈이다. 퍽 싱싱하기도 하다.      


‘오늘은 또 뭘 먹나.’ 집이 휴식처이자 일터인 1인 가구 프리랜서는 이 고민을 하루에 세 번은 해야 한다. 여기에 ‘제대로’라는 조건까지 붙으면 고민의 난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제대로 요리를 해보겠다고 덤벼들면 식사를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데에만 하루를 다 보내기 일쑤. 학창 시절 지겹게만 느껴졌던 학교 급식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일단 나는 나대로 살길을 찾는다. 혼자 살면 그놈의 영양 밸런스를 챙기기가 힘들고, 특히나 채소 섭취가 어렵기 마련이라, 억지로라도 채소를 매 끼니 챙겨보자는 마음으로 채소 구독 서비스를 신청했다.      



직접 만든 아욱 파스타. 진짜 맛있다. 

내가 선택한 곳은 ‘어글리어스’. 2주마다 한 번씩 채소 박스가 도착한다. 싱싱하고 품질도 좋지만, 못생겼다는 이유로 시장에 나가지 못하고 버려질 운명의 채소들을 구출해 싼 값으로 배송해 주는 서비스다. ‘이게 왜 못생겼다는 거지?’ 싶은 채소부터 생전 처음 보는 별난 모양의 채소까지 개성 만점의 채소 여러 가지가 한 박스에 담겨 도착하는데, 이게 제법 나의 채소 섭취량 늘리기에 큰 도움을 줬다. 내 손으론 절대 사지 않을 채소, 혹은 처음 먹어보는 채소가 레시피 종이와 함께 도착하니, 이걸 어떻게 해 먹나 고민하다 보면 메뉴 고민을 제법 덜어낼 수 있다.      


뜻밖의 취향이나 레시피를 알아내기도 한다. 난 아욱을 넣어 파스타를 해 먹어 보고 아욱이 이렇게나 맛있는 채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다진 마늘, 간장 반 큰술, 액젓 반 큰술, 애호박과 아욱을 듬뿍 넣어 휘리릭 만든 뒤 마지막에 레몬즙만 뿌려주면 되는 간단한 파스타다. 반 자른 방울토마토를 조금 곁들여 줘도 좋다. 아욱의 야들야들한 특유의 식감과 향이 기가 막힌다. 아. 생각했더니 군침이 돈다. 또 해 먹고 싶네?      




이번에 만든 토마토 마리네이드와 당근 마리네이드. 샐러드에 넣어 먹으면 좋다. 

물론, 간단한 요리고 뭐고 귀찮아 죽겠는 날이 훨씬 더 많다. 그럴 땐 여러 저장식을 가득 해서 냉장고에 채워놓고, 최대한 메뉴를 단순화한다. 그럴 때 만들어두는 것이 당근 마리네이드와 토마토 마리네이드. 당근 마리네이드는 당근을 채 썰어 소금에 30분 정도 절여준 뒤, 물로 가볍게 헹궈주고 (중요하다. 헹구지 않으면 멸망한다. 경험담이다.)올리브유, 식초, 설탕이나 꿀을 섞어준 뒤 냉장고에 하루 정도 뒀다가 먹으면 된다. 기호에 따라 후추도 첨가한다. 내가 먹는 유일한 당근 요리다. 토마토 마리네이드는 절이는 과정만 생략해주고, 기호에 따라 바질이나 연두를 추가해주면 된다.      



둘 다 샐러드에 넣어주면 색감, 식감, 맛이 확 살아서 좋다. 피클처럼 단독으로 먹어도 좋고, 토마토 마리네이드로는 샐러드 파스타도 해 먹을 수 있다. 한 번 왕창 해두면 냉장고가 제법 든든해진다. 일단 이놈들만 넣으면 채소 섭취는 어느 정도 해결되니, 메뉴 고민에도 도움이 된다. 샐러드가 맛있어져서 채소 섭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사실 이것들은 다 내가 좀 부지런히 움직일 때 해놓는 것들이고, 대체로 밑반찬을 사두고 냉동식품을 왕창 사둔 다음 어지간한 식사를 해결하는 때가 많다. 미리 소분해서 얼려둔 밥에 미리 사둔 밑반찬과 그냥 구우면 반찬이 뚝딱 해결되는 냉동식품 몇 가지로 나의 작은 식판을 채우면 이게 또 제법 그럴싸한데 먹고 치우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적다.      


그 외에도 미리 요거트메이커로 만들어 둔 요거트, 배달시켜 먹고 남은 것을 열심히 소분해 둔 냉동 피자 같은 것들이 귀찮음을 이기고 끼니를 때우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역시 현재의 나를 살리는 건 미리미리 부지런히 움직여 뒀던 과거의 나다. 고맙다, 과거의 나야. 넌 비록 해야 할 일을 안 해서 나의 발등에 불을 붙여놨을지언정 굶겨가며 일을 시키진 않는구나.      


이번에도 열심히 썰고 깎아가며 토마토 마리네이드와 당근 마리네이드를 왕창 해뒀다. 싱싱한 샐러드 채소도 가득 사뒀고. 처리해야 할 감자도 있으니 조만간 그놈의 대량조리 카레를 한 번 더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분간 ‘오늘은 뭘 먹나’하는 고민은 해결이다.      


매일 영양 밸런스를 확실하게 맞춘 다양한 식단을 제공해 주는 학창 시절 영양사 선생님은 이제 없으니, 나라도 미래의 나를 위한 영양사가 되어줘야지. 이제 미래의 내가 할 일은, 과거의 내가 만들어 둔 것을 썩히지 않도록 열심히 먹고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다.      


미래의 나야. 잘해라. 저거 만드는 데에 힘들었으니까, 당분간 매일 한 끼는 샐러드다. 명심해. 귀찮아도 먹고 해라. 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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