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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징 Jun 27. 2023

야. 밥 먹고 해. 카레 해놨어.

나를 지켜주는 9인분의 카레

230501





카레를 끓였다. 집에 있는 감자와 양파와 고기를 때려 넣고 열심히 팔을 휘저어 가며 만든 카레는 무려 9인분. 참고로, 나는 1인 가구다. 카레는 작은 밀폐용기에 세 국자씩 푹푹 퍼 담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한 그릇은 오늘 저녁밥이다. 먹어보니 이만하면 맛이 좋다. 당연하지. 고기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데. 배와 함께 마음이 든든해진다. 자. 이제 마감을 달릴 준비가 끝났다. 


웹 소설 작가인 나에겐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다. 중요한 원고 마감이 다가오면 카레를 한 솥 끓여놓는다는 것. 그리고 약 일주일 동안 매일 카레를 먹는다. 원고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초조하고 속이 답답해서 다른 것은 조금도 신경 쓸 여유가 없는데, ‘오늘은 또 뭐 먹나’하는 고민이라도 줄이려 선택한 방법이다. 

이렇게 해두면 밥 챙겨 먹기도 편하다. 냉장고에서 냉동해 둔 밥 하나와 카레 하나를 툭툭 꺼내서 데운 다음 큰 그릇에 담아 대충 비벼 먹으면 끝. 조금 여유가 있으면 거기에 간단한 반찬이 몇 가지 추가되기도 한다. 다 먹고 나면 나오는 그릇도 몇 개 없어 설거지도 금방이다. 조급해지면 온갖 것이 다 귀찮아지는 나에겐 아주 딱 맞다. 


마음이 바빠지면 제일 먼저 나는 나를 놓는다. 수없이 많은 ‘해야 할 일’ 목록 중에 가장 덜 중요하고 덜 급한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데, 그것은 공교롭게도 나를 위한 일들이다. 밖에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채, 밥을 대충 먹고, 청소를 팽개치고, 씻는 걸 포기하거나, 혹은 잠을 아무렇게나 잔다. 설거짓거리가 쌓이고, 피부가 푸석해진다. 어쩐지 속도 더부룩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집안 꼴도, 내 꼴도 엉망. 이걸 또 언제 복구하지? 새로운 걱정 때문에 가슴의 답답함이 추가된다. 죄다 내가 더럽힌 건데, 그걸로 받는 스트레스도 내 몫이다. 물론, 그걸 다 치우는 것도. 


이렇게 식음을 전폐하며 마감을 달리면 일의 효율이 오르는가? 대답은 ‘아니’다. 쌓이는 설거짓거리만큼 원고의 글자 수도 쌓이면 좋겠는데, 쌓이는 건 자책과 비관이지 글자 수가 아니더라. 역시 나를 놓는다고 일이 잘될 리가 없다. 일하는 것 역시 나이기 때문이다. 싱크대에 쌓인 설거짓거리와 나의 우울함이 비례한다는 걸 발견하고 나서야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참 오래 걸렸다. 


대량생산 카레의 효과는 생각보다 괜찮아서, 이걸 끓여놓고 맞이하는 마감은 스트레스가 조금 덜어진다. 매일 똑같은 메뉴일지언정 집밥은 챙겨 먹게 되니 속도 훨씬 편하다. 배달 음식 때문에 지갑에 구멍 날 일도 없다. 과거의 내가 열심히 감자를 깎고 양파를 썰어가며 준비한 카레에 감사하며 다짐한다. 이걸 다 먹을 때쯤엔 원고를 끝내놓자고. 이쯤 되면 카레는 내가 날 위해 준비한 응원의 메시지인 셈이다. 야, 인마. 밥은 먹어가면서 해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냐. 


사진: Unsplash의Gilberto Olimpio


혼자 사는 프리랜서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은 나를 챙기는 일이다. 내가 아니면 날 챙겨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내가 와르르 무너졌을 때 복구해야 할 사람 역시 나뿐이다. 게다가 그것을 복구하는 데에 드는 시간과 돈 역시 내 것이기 때문에, 무너지기 전에 단단히 붙들어 주는 것이 효율적인 측면에선 훨씬 낫다. 게다가 이 몸뚱이가 언제 징징대고 뭘 해야 기운을 내는지 가장 잘 아는 것도 나이니, 기왕이면 전문가가 챙겨주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서 최근엔 나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 슬슬 식탁 위가 너저분해지고 배달 음식이 당기는 걸 보니, 이건 내가 조급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에겐 이 자식이 또 자신을 놔버리기 전에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할 중대한 의무가 있다. 그래서 사람을 모아 벌금을 걸고 운동 인증을 하는 운동 스터디를 재개했고, 2주 동안 평일 오전마다 출석해야 하는 온라인 작업실도 신청했다. 강제로라도 날 챙기기 위함이다. 냉장고엔 다시 카레가 그득하게 쌓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건가 보다. 나 스스로 나를 챙기는 것. 이젠 스스로 쌀에 잡곡과 콩을 섞고, 영양제를 꼬박꼬박 입에 털어 넣으며, 매끼 식사에 채소를 추가하고, 꾸역꾸역 PT를 등록해 운동한다. 의지박약에 게으름뱅이인 나에겐 이것이 몹시도 힘든 과업이라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그래도 이젠 주변에서 보이는 위험 신호를 알아보는 눈이 생겼으니, 무너지기 전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되어 좋다. 물론, 이렇게 잘 챙겨줘도 나는 여전히 일하기 싫다고 징징대고, 쉽게 자괴감에 빠져 나를 내던지기 일쑤지만. 


슬슬 배가 고프다. 밥때가 와버렸다. 카레가 아직 8인분이나 남았으니 뭐 먹을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오늘은 오전을 알차게 보낸 덕에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반찬을 좀 해볼까? 맛있고 배부르게 잘 먹고, 설거지도 해놓고, 자리에 앉아 오후의 일을 시작해야지. 저녁 먹을 쯤엔 오늘의 목표 업무량을 어느 정도 끝내놨길 바란다. 그럼 저녁엔 특식으로 우동을 먹을 거다. 물론, 카레 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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