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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징 Jun 26. 2023

홈 바리스타. 오늘의 커피

오늘도 맛없는 엉망진창 드립커피

230530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린다. 물을 끓이고, 전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필터에 직접 내린 드립 커피.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오전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모닝 재즈와 함께 은은한 커피 향을 즐긴다. 음~ 맛없어. 오늘 커피는 망했구나!      


드립 커피의 깔끔한 맛과 커피를 내릴 때의 분위기가 좋다는 이유로 원두를 사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됐다. 작은 드립 포트에, 워터 드리퍼에, 필터까지 열심히 골라 나름대로 장비 구색도 갖췄고, 유튜브를 뒤적이며 커피를 내리는 방법을 대강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내린 커피 맛은 늘 들쭉날쭉. 유독 맛없는 날이 절반 이상이다. 사실 원두의 맛을 잘 아는 것도 아니라서, 이게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별 불만 없이 마신다. 전문가도 아닌데 어쩌겠어.      


드립커피를 위한 장비를 갖추기 시작할 때부터 제대로 커피를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어떤 클래스를 들을지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막상 신청하려니 결제 버튼에서 한참을 망설이게 된달까. 이걸 듣고 나면 나의 못된 강박이 머리를 들까 봐 두렵기도 하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있다. 계획부터 실행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작 자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나. 가끔 SNS에 떠도는 완벽주의 성향의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 그게 꼭 나 같다. 뭘 하려면 ‘잘한다’ 소리를 들을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 거기서 돈까지 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시작하기 전부터 이것저것 많이 조사하고, 계획한다. 그리고 계획에 지쳐 시작하지 못한다. 혹은, 하던 중간에 놓아버린다. 못하는 나를 봐버렸기 때문이다.      


사진: Unsplash의Estée Janssens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취미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식으로 놓아버린 취미가 한둘이 아니다. 일본어 공부, 그림 그리기, 운동, 다이어리 꾸미기, 심지어 책 읽기까지. 이상은 높은데 내가 그만큼 잘하지 못하는 것에 질려서 금방 내려놓기 일쑤다. 결국, 그 중엔 잘하게 된 것은커녕 취미로 완전히 정착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막 손에 잡은 주제에 뭘 그렇게 프로처럼 잘하고 싶어서 안달인지.      


이 강박의 가장 큰 원인은 목표가 높아도 너무 높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잘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찾다가 온갖 고수들을 접하고, 그들을 따라 해 보겠답시고 가랑이를 쫙 찢었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너덜너덜 뱁새가 되어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고수들에게도 초보의 시절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저 그 과정을 보지 못했을 뿐이란 걸 모르는 게 아닌데. 자꾸만 나는 그들의 결과만을 좇는다. 그리고 잘하려는 노력이 결국 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 그만두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국은 잘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까지나 나는 이것을 즐기기 위해 시작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내가 이걸 시작한 이유는 아주 작고 소박한 것뿐이었다는 걸 되새겨야 한다. 일본어를 잘하고 싶었던 건 그저 만화와 게임을 다양하게 접하려는 거였고, 다이어리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던 건 종이에 스티커 한 판을 몽땅 붙여버리는 행위가 재미있기 때문. 단지 그것 아니었나? 잘하려는 건 분명 나의 목적이 아니었다.      


영 서툴고 허술해도 이건 이것 나름대로 귀엽고 매력 있지 않냐며 나 자신을 추켜세워…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이게 참 힘들다. 망상 속의 나는 이미 다꾸 신의 경지에 도달해 구독자 100만의 다꾸 유튜버가 되어 다꾸 시장을 주름잡는 세계 최고의 다꾸러란 말이다. 망상을 끊어내고 잘할 필요 없이 못해도 즐기기만 하면 장땡이란 마음을 먹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참 별게 다 노력이 필요한 세상이다.      


잘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는 건 어렵다. 결국 ‘좋아한다’는 마음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니까 더 많이 알고 싶고, 그러다 보면 더 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고, 자연스레 나도 그만큼 해보고 싶어진다. 그러니 잘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잘하는 나’라는 결과만 쏙 집어먹고 싶어 하는 나의 게으르고 얍삽한 마음이다. 어쩌면 천천히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쉽게 초조해하는 나의 성급함이 문제일지도 모르고.      


결국, 일단 커피 배우기는 보류했다. 내가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걸어 나가는 나를 봐줄 수 있을 때쯤, 이제 슬슬 내 맛없는 커피가 맛있게 느껴지길 바라게 될 때쯤 다시 도전해 보련다. 어디 외출하는 김에 슥 들러 가볍게 커피에 대한 기본 상식 정도만 훑어주는 가벼운 클래스를 찾게 된다면 그때 도전해봐도 좋고.      


같은 원두와 같은 장비를 쓰는데, 나의 커피 맛은 매일매일 다르다. 커피의 향을 즐긴다기보다 오늘의 향과 맛으로 오늘의 운세를 점쳐보는 느낌으로 커피를 즐기고 있다 보니 이것도 이 나름의 재미가 있다. 슬슬 취미로 정착할 수 있으려나? 이런 식으로 취미를 몇 가지 더 찾아보고 싶다. 물론, 아직은 망상 속에서 원두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분류하며 끝내주는 드립커피를 즐기는 홈 바리스타인 내 모습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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