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적인 속삭임
아일랜드 여행동화 <위클로우의 파라다이스>
by 술빚는 여행자 신동호 Dec 16. 2019
“엄마, 저기 봐! 검은 양이 있어!!”
양의 무리가 보였다. 머피는 엄마 손을 붙잡고 좀 더 다가갔다. 얼핏 보면 하얀 양들만 있는 것 같지만, 무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검은 양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나무 그늘에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 양을 처음 본 머피는 호기심이 생겼다.
“엄마, 왜 저 검은 양만 초원 꼭대기에 혼자 있을까?”
“머피야, 양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길 좋아해. 아마 검은 양도 그 이유일 거야”
“심심하지 않을까? 그늘 속이 추울 텐데……”
“음…… 글쎄다. 우리가 검은 양에게 가볼까?”
종종걸음으로 가는 머피와는 달리, 큰 보폭의 빠른 걸음으로 올라온 엄마가 먼저 검은 양 앞에 도착했다. 신발이 미끄러워 두 발이 얼음이 된 머피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머피의 보행에 도움을 될 만한 긴 나뭇가지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낯선 말소리가 들렸다. 머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기…… 들리나, 내 목소리?”
“누구시죠? 내…… 내가 어떻게 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죠?”
“당신은 양고기를 먹지 않지? 당신에게서는 양고기 냄새가 나지 않아. 더구나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양은 흡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전 채식주의자예요.”
엄마는 믿기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이때 머피가 엄마의 옆에 도착했다. 엄마는 어리둥절하며 딸의 손을 잡았다.
“머피야, 엄마가 올라오다가 발목을 삐끗한 것 같은데 바르는 약 좀 가져다줄래?”
엄마는 방금 주운 나무지팡이를 주며 딸을 내려보냈다. 엄마의 관심은 오로지 검은 양에게 가 있었다. 검은 양은 시종일관 부동자세와 투정 섞인 말투로 엄마를 대했다.
“그런데 왜 저에게 반말하세요?”
“반말해서 기분 나빠? 나도 처음에는 존댓말을 했었지. 지나가는 인간에게 인사도 하고. 그런데 공손할수록 돌아오는 건 상처밖에 없더라. 험한 말을 하거나 심지어 손찌검을 하고 간 적도 있었어. 멸시받는 기분을 너희는 모를 거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인간이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지? 당신에 대해 궁금해지는군.”
검은 양이 호기심을 보이며 일어섰다. 놀란 엄마는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떨어뜨렸다. 진흙에 파묻힌 선글라스를 휴지로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검은 양도 앉아 풀을 뜯었다. 태양이 눈을 찌르자, 엄마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전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면, 덜덜 떨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어요. 공부를 잘해서 대학원까지 진학할 수 있었는데, 논문 발표가 두려워서 졸업을 못 할 정도였어요. 너무 한심한 마음에 혼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어요. 우울해서 뭐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달리기였어요. 강변을 코스 삼아 매일 뛰었어요. 그러다가 전국을 여행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요. 남편은 저의 똑똑함에 관심을 보였고, 전 그의 대범함에 반했죠.”
엄마는 검은 양이 사제복을 입은 신부로 착각한 듯 박제됐던 지난날을 고백했다. 먼지의 더께로 붙어있던 서랍이 열린 듯 뻥 뚫린 기분으로 심호흡을 한번 했다.
머피는 오롯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살금살금 내려갔다. 브랜든과 아빠는 엄마가 싸 온 쌈 채소를 하얀 양에게 물려주느라 바빴다. 검은 양이 음지에서 나와 엄마 곁으로 다가왔다.
“난 말야. 태어나보니 나 혼자 검은 털인 거야. 털이 검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자랐지. 양의 무리에서는 따돌림을 받았지만, 인간들은 날 더 좋아했어. 신기했지. 같이 사진도 찍고, 먹을 것도 나눠주고. 그 순간 나에게 욕심이란 게 생기더라. 탐욕일지도 모르지.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인간들은 다가와 날 보듬어줬어. 인간들 모두 내 편 같았는데 저 하얀 양들이 눈에 보이겠어? 권력이란 게 파도처럼 스멀스멀 밀려오더라.”
“검은 양은 다른 양과 달라 불행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이렇게 대화하지 않았다면, 전 아직도 검은 양은 모두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갔겠죠.”
“나도 당신이 멋만 부리는 아줌마로만 알았겠지?”
“뭐예요?”
멀리서 머피가 약을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엄마는 검은 양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머피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검은 양은 음지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잠시나마 20대의 자신을 꺼내 본 엄마는 이 시간을 영영 잊고 싶지 않아 자고 있는 검은 양을 사진에 담았다. 머피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