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쩌면 가장 신비로운
아일랜드 여행동화 <위클로우의 파라다이스>
by 술빚는 여행자 신동호 Dec 17. 2019
울타리 밖의 양을 무서워했던 머피와 브랜든도 이젠 경계심을 풀었다. 줄지어 걸어가는 양의 대열이 신기해서 머피는 그 뒤를 쫒아갔다.
“먼저 위협하지 않는 한 양이 우리를 해치는 일은 없을 거야.”
아빠는 양들이 우리의 가이드일 수도 있겠다며 따라갔다. 학교에서 했던 가장행렬이 생각났는지 브랜든은 여러 동물의 흉내를 냈다. 신기하게도 양이 가는 길마다 옐로 맨이 보였다. 마치 알고 가는 것처럼. 지도를 펼친 엄마도 위클로우가 멀지 않음을 직감했다.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어흐림 Aughrim. 위클로우 주에 있는 마을이었다. 높은 곳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시야에 모두 들어올 정도로 소박했다. 날이 어둑해져 숙소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저렴한 호스텔, 게스트하우스부터 호텔까지 묵을 빈방이 없었다. 마지막 숙소 앞에서 아빠가 주저했다. 기운이 빠진 아빠를 대신해 엄마가 게스트하우스의 초인종을 눌렀다. 앞장서서 하는 게 낯설었는지 초인종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누구세요?”
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혹시 방 있나요?”
햄버거를 베어 물고 나온 숙소 주인은 덩치가 큰 사내였다. 엄마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왜 가는 곳마다 방이 없는 건가요?”
“오늘은 킬케니에서 친선 축구팀도 오고, 저 맞은편 빨간 문에 사는 아드리안느의 결혼식이 있었어요. 그 하객 중 일부는 여기에 묵고 있구요. 마을이 작다 보니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항상 벌어지는 일이에요. 우리 집도 빈방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엄마는 더 매달릴 수가 없었다. 머피는 숙소 주인에게 롤리팝 맨의 집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아는지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NO’ 였다. 결국, 아무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마을 주위를 서성였다.
오늘만은 네 명 모두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박을 하기엔 너무나 지쳤다. 엄마는 씻고 싶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밤의 냉기는 이들을 더 조여 왔다. 대책 없이 마을을 돌아다녔다. 하나둘 불이 꺼진 집 사이로 창문 속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펍이 보였다.
“엄마가 물어보니까, 펍은 새벽 2시까지 운영한대. 우리 저기서 시간을 보내볼까?”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 있어. 엄마는 배낭에서 찾을 게 있어서 좀 있다가 들어갈게.”
엄마는 젖지 않은 잔디밭에 털썩 앉아 등산화를 벗었다. 젖은 양말을 벗자 물에 불어터진 새하얀 발이 드러났다. 발바닥에 잡힌 물집만 봐도 그 고통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배낭 위에 묶어놓았던 양말이 한나절 햇빛을 받아 거의 말랐다. 양말을 갈아 신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펍으로 들어갔다.
펍 안은 생각 보다 북적였다. 신랑, 신부가 섞여 있는 테이블, 옷은 단정하지만 흙 묻은 축구화를 신은 아저씨들, 바에서 스포츠 채널에 빠진 어르신들. 마지막에 들렀던 게스트하우스 숙소 주인의 가족도 보였다.
“어서 오시오. 당신들 아까 지나가다가 봤어요.”
“아, 그래요?”
“여기서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는 건 당신들밖에 없었으니까. 아까 공원 앞에서 강아지랑 놀아주는 것도 봤지요.”
저 안쪽에는 그 강아지 주인 일행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머피의 일행을 알아봤다. 이들의 목격담이 여러 테이블에서 경쟁적으로 나왔다. 조금 민망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엄마는 맥주와 음식을 주문하러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테이블에서 배낭을 지켰다.
“아직도 숙소를 못 구했어요?”
“예, 대책이 없네요. 우선 여기서 추위 정도는 피하려고 들어왔어요.”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머피의 가족에게 맥주와 음식을 대접했다. 서로 사겠다고 난리였다. 극진한 친절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어른들이 마을 사람들과 대면하는 사이에 머피와 브랜든은 시끄러운지 말도 하지 않고 귀를 막았다. 피곤한 브랜든이 눈을 붙었고, 머피는 아빠에게 말하고 잠시 펍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매서웠다. 머피는 주머니 난로를 꺼내려는데, 어제 헛에서 가져온 크레파스가 손에 닿았다. 쪽지의 메시지를 다시 천천히 읽어봤다.
‘이 크레파스가 정말로 날 지켜줄까?’
머피는 벤치에 앉아 쪽지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장 원하는 걸 생각하고 그걸 그리기로 했다. 밤을 보낼 수 있는 집을 그렸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별똥별이 옆 공터에 떨어지면서 집 하나가 생겼다. 머피가 그린 그대로의 그 집이었다. 머피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텅 비었다. 다시 이것저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 완성되는 족족 공간이 채워졌다. 난로, 침대, 부엌, 소파, 게임기 등. 크레파스가 다 닿도록 집 안에 필요한 것들을 그렸고, 그림이 완성되면, 알아서 공간이 메워졌다. 드디어 머피가 상상하는 집이 완성됐다. 크레파스는 닳아 없어졌다. 머피는 신기하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얼른 다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엄마, 아빠, 브랜든!!! 여기로 나와 봐!!!”
“머피야, 얼른 와서 칩스 먹어봐. 방금 나온 거라 바삭해.”
“지금 칩스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얼른 나와 봐요. 브랜든 일어나 빨리.”
사람들의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있자, 머피는 팔을 붙들고 일으켰다. 가장 가벼운 브랜든이 먼저 끌려 나왔다.
“도대체 뭣 때문에 나오라는 거야.”
“짜잔!!! 우리가 오늘 보낼 집이야.”
“응? 이 집 뭐야?”
“어때? 내가 그린 집이야.”
“그렸다고? 뭔 얘기야?”
“어제 우리가 가져왔던 크레파스 있잖아. 그 크레파스로 그렸더니 이렇게 집이 지어졌어.”
뒤에서 머피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와 아빠도 어리둥절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머피에게 되물었다. 엄마는 들고 있던 잔을 아빠에게 넘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완벽한 집이었다. 음식 재료가 가득한 냉장고, 뜨거운 물이 채워진 욕조. 방 안의 온기는 적당했다. 모두 안으로 들어와 탄성을 질렀다.
“머피야! 이 모든 걸 니가 했다고? 믿어도 돼? 오늘 여기서 잘 수 있는 거야?”
“네, 아빠. 제가 했어요. 우리 씻을 수도 있고, 배불리 먹을 수도 있어요. 거실에 앉아 게임도 할 수 있어요.”
“난 먼저 씻어야겠다. 머리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못 참겠어. 엄마 수건 좀 챙겨줄래?”
각자 원하는 걸 찾아 집 안을 돌아다녔다. 아빠는 방에서 신문을 읽고, 엄마는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브랜든은 부엌에 차려진 저녁을 먹고, 머피는 거실에 앉아 게임을 하다가 배낭을 살펴봤다.
“빨래 있으면 주세요.”
“머피가 웬일이야?”
머피는 모아둔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다. 설거지는 아빠의 몫이었다. 브랜든이 옆에서 마른 수건으로 접시의 물기를 닦았다. 샤워를 마친 엄마는 서재에서 책을 꺼내왔다. 자정이 되자,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머피와 브랜든은 거실로 나와 벽난로 앞에 앉았다.
“브랜든, 우리 저번에 그렸던 거 다시 그려볼까?”
“위클로우를?”
“어떻게 그렸는지 생각나?”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