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양주연구소는 한국 술을 배우고 빚는 과정을 실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교육기관이다. 오랜만에 수강생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니 설렘보다는 근심이 강했다. 살아오면서 들었던 오프라인 강의 중, 'KBO 프로야구 기록원 아카데미'만이 유일하게 90% 이상 출석, 수료했었다. 종로와 강남 어학원에 기부(?)한 돈은 등록금과 맞먹을 정도다(프리미엄급 수업을 등록하게 된 도화선은 위장된 의지력). 둘의 차이는 간단하다. 영어 수업은 배워야 하는 당위성과 군중심리에 현혹된 선택이었다면, 야구기록원 수업은 호기심 해갈에서 시작해 끊임없는 학습의욕으로 마무리까지 지을 수 있었다. 이 맥락에서 술빚기 수업은 수강하는 게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2013년은 ‘반칠십’인 서른다섯 살이 되는 해다. 세월을 정주행 하다가 첫 번째 마주했던 큰 둔턱이 서른 살이었고, 내 윗세대의 나이라 절대 유물로 물려받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흔까지 딱 절반이 남은 해이기도 했다. 남들보다 직장생활을 늦게 시작해 한창 입지 다지며 뒤따라가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지만, 오히려 플랜 B를 일찍 설계하고 실행하는 게 인생의 승부수라 믿었다. 현재 하는 일의 피로감과 매너리즘에 떠밀려 형성된 미래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흥미로움이 지친 현재가 내민 바통을 이어받을 자신이 있다면 지금 변신하는 나를 신뢰해도 좋았다. 가슴 뛰는 일에는 선후배가 없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30대의 안정기를 원했던 부모님과의 타협이다. 마찰이 불가피했다. 부모님과 나의 인간관계론은 항상 대척점에 서 있었다. 술과 담배는 백해무익이고, 사람은 낮에 만나야 한다는 지론을 펴는 분들이다. 비겁하지만 퇴사와 수강 관련 통보는 미루기로 했다. 적당한 시기를 찾던 계획은 차츰 늦어지는 아침 기상으로 탄로가 나 결국 개강 일주일 후에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정신 차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쏟아냈다. 아무튼 수업은 시작됐다, 나의 인생 2막의 신호탄이다.
10기가 졸업했다. 2013년 1월 5일,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한국가양주연구소 11기. 내게 새로 부여된 히스토리다. 주변에서 술을 빚으러 다닌다니까 반응이 대동소이했다.
“오, 진짜? 그런 데도 있어?”
“나중에 너 빚은 술은 내 거다?”
이미 본인 술인 양 ‘선계약 후분양’하기 시작했다. 선계약의 부담감보다 내 미래에 대한 부담감이 더 컸다. 잘하는 짓인가. 새해는 모든 도전에 포용적이라 리스크가 가늠되지 않는다. 그래 원래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나의 현재는 어떤 그림일까. 그동안 도화지에 수없이 그려왔다. 일휘필지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밑그림만 몇 번 그리다가 지웠는지 움푹 파인 흔적만이 도화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서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었다. 다시 하얀 도화지가 내 앞에 놓였다. 더 배급받을 도화지는 없다(라고 다짐했다).
큰 그림의 첫 터치가 시작될 곳에 도착했다. 과연 어떤 사람들과 이 수업을 들을까, 난 이들 사이에서 겉돌진 않을까. 예상되는 상황 전개를 혼자 상상해보다가 이뤄지지 않은 미래는 놔두기로 했다. 반투명한 강의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수업 시작 10분 전, 이미 와 있는 수강생들은 각자 편한 자리를 선점하고 수업을 기다렸다. 남은 자리 중 가장 사각지대에 가방을 묻었다. 평소 분위기에 따라 행동하는 유형이라 공간 속 사람들을 먼저 관찰했다. 보통 무심하게 앉아 있는 ‘과묵형’, 옆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넉살형’, 강의실 내부를 탐방하는 ‘사건 수사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교복 입은 학생이 아니다. 옷차림으로 동기 수강생의 신상과 직업을 추론해봤다. 세미 정장을 입은 공무원, 은발의 중절모를 쓴 퇴직한 대기업 임원, 포니테일 한 머리 위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대학생, 원피스 위에 앞치마를 입은 식당 이모분. 그 사이에 있는 난 회사를 얼마 전에 그만둔 백수. 저들에게 내 첫인상은 뭘까.
가슴 어딘가에 고정하라고 준 명찰은 테이블에 내버려 둔 채, 휴대폰을 들고나갔다. 뜬금없이 연락해도, 별 목적 없이도 5분 이상 통화가 가능한 친구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인사도 하지 않은 수강생의 면면을 느낀 바 순서대로 풀어놨다. 듣기 싫은지 대답 소리만 들렸다. 때마침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통화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강생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향했다. 온 사람마다 인사를 받아주는 그분은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님, 나의 미래를 이끌어 주실 분이다. 술을 빚고자 결심한 지난달, 민주와 감자탕을 먹으러 갔었다. 감자탕에는 당연히 소주였지만, 이젠 막걸리 주문이 싫지 않았다.
“근데 가양주연구소 괜찮아?”
“형, 완전 추천해. 술 빚는 거 아예 몰라도 소장님이 알기 쉽게 알려줘. 내가 몇 군데 알아봤는데, 여기가 가장 저렴했어. 아 그리고, 가장 젊으셔.”
약간 바랜 청색 생활 한복을 입고 나오신 소장님의 얼굴은 ‘청춘’이었다. 복장과 가양주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도 그의 젊음을 희석할 수 없었다. 확인된 그의 첫 느낌만으로 집요함이 발동했다. 단번에 날 각인시킬 첫인사말이 필요했다. 아주 짧고 강렬하게 말이다.
“안녕하세요. 혹시 10기에 민주 아세요? 저 민주가 소개해서 수강했거든요.”
생각해낸 인사말이 고작 이거였다. 나의 포부와 기개 따윈 없고 민주에게 기댄 존재감 어필이었다. 부끄러운 첫인사는 여전히 기억나지만, 돌아온 소장님의 대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속으로 자책한 탓에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계기로 소장님과의 대화에는 민주의 안부가 기본 옵션이 되었다.
수강생과 얽힌 틈을 비집고 먼발치에서 소장님만을 직캠(?)하듯 관찰했다. 가볍게 눈인사만 하는 사람부터 술에 대한 밀도 있는 질문을 하는 수강생 모두에게 한결같은 무드로 응대하셨다. 조금 무례하고 곤란할 법한 상황도 본인의 매뉴얼에 따라 대처하셨다. 이것이 연륜이구나.
하지만 처음 내가 상상했던 이 세계의 연륜과는 달랐다. ‘전통주의 스승=나이 많은 사람’의 공식은 선입견이었다. 훗날 소장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어린 사람이 교단에 서서 술을 가르친다고 하니 무시하거나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식으로 트집을 잡는 수강생이 더러 있어서 수업을 시작한 초창기에 힘들었다고.
소장님이 생활 한복을 꾸준히 입고 다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루한 사고는 유리 장벽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 술을 가르치는 게 주 업무지만, 전통 예절이 아집과 차별로 둔갑해버린 업계 관행과도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튼 전통주 세계에 대한 내 선입견을 깨준 것만 해도 소장님과의 첫 대면은 성공적이었다.
출석부의 이름이 불리면서 11기 첫 수업이 시작됐다. 긴장되지만 안 할 수 없는 수강생의 자기소개 시간. 매번 해도 늘지 않는다. 오히려 긴장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학창 시절 때 훨씬 수월하게 넘어갔던 것 같다. 두근거림을 진정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뒷좌석까지 자기소개가 끝나자 수업을 돕는 분들이 강의 공간으로 들어와 술이 채워진 잔을 자리마다 놓고 가셨다. 생각지도 않은 술잔의 등장에 수강생들은 동요했고, 어느새 교육장 안은 향에 취해 마시지 않으면 작은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여러분, 혹시 술을 마시면서 수업받으신 적 있으신가요? 저희는 마시면서 시작하니 좋죠?”
아직은 대답도 어색해 잔을 들어 긍정의 표현을 했다. 민주가 내게 졸업주라고 들이밀었던 그 한잔과는 느낌이 달랐다. 새로운 시작 전에 치르는 의식과도 같은 잔이었다. (나만 너무 진지한 건가.) 잔에 입을 가져가 평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에 첫 문을 두드리며 잘 봐달라고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이 술은 오양주에요. 오양주는 다섯 번 빚었다는 뜻이죠.”
일단 노트에 적었다, 오양주. 다섯 번이란 말이 중후하게 와 닿았다. 술에 대한 소양이 부족해 담은 정성을 모르고 마셨지만, 입안의 미뢰는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었다. 착착 감긴다는 말을 아껴두기 힘들 정도다. 1온스 안에 담긴 술이 뭐라고. 수업 시간 전 딱 한 잔은 정말 딱 떨어지는 애피타이저였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다 만들 술이에요. 더 맛있는 술이 나올 겁니다.”
술 한잔과 소장님의 첨언으로 신비한 술의 세계가 열렸다. 불확실한 장막 하나 정도는 벗겨진 듯했다. 술은 평생 마셔온 거지, 배운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술(와인)은 병에 담긴 시라고 했다. 이제 그 시인이 되는 첫 기문을 통과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