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 수업의 유레카







#4-1. 마시는 시간은 찰나지만 과정은 억겁


수업은 정시에 시작됐다. 소장님은 수업 중 규칙을 설명했다. 질문은 강의를 마치고 받겠다고. 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질문의 질문이 꼬리를 물면 이론과 실습이 맞물린 커리큘럼에 부하가 걸릴 게 농후했다. 수업은 보통 10분 전에 마쳤다. 최소한 수업 종이 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강을 했던 선생님과는 달랐다.


우리나라 술은 쌀을 기본 재료로 빚는다. 흔히 막걸리라 부르는 발효주는 빚을 때 최소 다섯 시간이 필요하다. 다섯 시간 동안 부단히 노동력을 쏟아붓는 건 아니다. 물로 씻은 쌀(세미)을 불리고(침미), 물을 빼고(탈수), 제분기로 빻은 쌀(작말)을 뜨거운 물과 혼합한(혹은 고두밥을 지은) 후 식히는(냉각) 작업 등이 작업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004_02.JPG 쌀을 씻고 침미하는 중


보통 세미는 10~15분, 침미는 2~3시간, 탈수는 1시간, 냉각은 30분 이상 걸린다. 마시는 시간은 찰나지만 그 과정은 억겁이다. 술빚기는 육체적 노동은 기본이고, 기다림의 인내가 수반되어야 한다. 결국 사 먹는 게 편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수료하는 분도 많단다. 아무튼 이론 수업은 실습 후 기다리는 시간에 맞춰 진행됐다.






조가 편성되었다. 한 달 동안 합을 맞춰야 할 사람들. 은근 가슴 떨리는 시간이다. 선정 기준은 소장님 마음대로였다. 나이를 굳이 묻지 않아도 수강생의 연령대는 꽤 높아서 난 막내 축에 속했다. 조원 중에 또래가 들어오길 바랄 뿐이었다. 난 기억을 신뢰하지 않아 필연적 기록을 해야 하기에, 잡일의 부담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한 살 어린 동생이 나와 같은 조가 되었다(이 친구와는 질긴 인연으로 아직도 조우한다.) 삼양주(세 번 빚는 술) 밑술(첫 번째 과정) 작업을 위해 실습장에 조별로 모였다. 소장님은 재료 보관실과 가까운 내게 부탁 하나를 했다.



#4-2. 이름의 재발견


“신동호 선생님, 멥쌀 좀 가져오시겠어요?”


가슴에 달린 명찰은 생각하지도 않고, 내 이름이 어떻게 호명됐는지에만 정신이 팔렸다. 당황해서 정작 들어야 할 내용을 듣지 못했다. 동질적 집단에 소속된 지 몇 분 되지 않은 한 살 어린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의 이름은 ‘장미’였다. 장미는 눈치껏 멥쌀을 항아리에서 퍼왔다.


수강생마다 가지고 있는 술에 대한 소양은 천양지차다. 첫날부터 본인의 아는 바를 과다 방출하는 부류도 있지만, 대부분 패를 감추고 있었다. 확실한 건 난 ‘문외한’에 속했다. 영어의 알파벳부터 배우려고 들어왔는데, 대부분 나보다 고수 아니면 고수인 척하는 사람. 질문의 수준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침묵의 탐색전이 불가피했다.






‘멥쌀? 찹쌀? 햅쌀?’


난 서울에서 태어났다. 시골도 없다. 농활의 경험치는 있지만, 작물을 보는 혜안은 없다. 쌀. 내가 아는 건, 평소 먹는 밥이 쌀에서 출발한다는 것. 멥쌀과 찹쌀의 차이점에 대해 수업 중이었다. 차이점은 고사하고 멥쌀이 뭐고 찹쌀이 무언가. 머릿속이 헛돌고 있는 와중에 햅쌀도 등장했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쌀인 것 같은데 어떻게 구별할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이론상 구분은 검색의 힘을 빌렸다. 흔히 지어먹는 쌀은 멥쌀이다. 찹쌀은 외형상 좀 더 흰색에 가깝고 성체가 불투명하다. 수업 종료와 동시에 발효실로 들어가, 멥쌀과 찹쌀을 조금씩 꺼내 비교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부터 알아내야 한다는 게 한심스럽기보다는 도리어 흥미로웠다. 술 빚는 과정을 수강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쌀로만 알았겠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멥쌀, 찹쌀이 되었다.




쌀분쇄.JPG 불린 쌀을 분쇄하는 과정



@brewer_diary

매거진의 이전글#3. 수업 시작을 알리는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