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시향가> 양조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낯선 향이 코끝을 스치고, 바닥에 닿는 발끝이 나의 존재를 조심스레 알린다. 친구의 집—그의 세계이자 내게는 입장 허락을 받은 낯선 별. 나는 미술관의 관람객처럼 시선을 천천히 옮긴다. 벽의 액자, 창가의 화분, 식탁 위의 물컵마저 주인의 결을 품고 있다. 그 결을 흩뜨리지 않으려 나는 숨소리마저 낮춘다. 사람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을 펼쳐 놓은 서재다. 어떤 이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문을 열고, 어떤 이는 마음의 안식을 나누고자 사람을 부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 문턱을 넘는 순간 ‘너는 괜찮다’는 문장을 선물처럼 받는다. 타인의 공간을 존중하는 일은, 결국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첫걸음이다.
동료의 양조장을 찾는 일은, 집에 초대받는 일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양조는 시간이 빚는 예술이기에, 분침 단위로 제조 공정이 쪼개져 있다. 누룩의 호흡과 발효조의 온도, 숙성의 시간이 어긋나면 술의 주질이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양조장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며칠 전 미리 방문 의사를 전하고, 그들의 시간이 내 방문을 품을 수 있을 때 찾아간다. 초창기 나는 호기심을 앞세워 낯선 양조장의 문을 슬며시 열고 의견을 구하곤 했다. 그땐 이 행위가 예의라고 여겼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 무지가 먼저 들어갔던 셈이다. 특히 작은 양조장일수록 누군가를 맞을 여분의 손이 없다. 환대는 가능하지만, 여유는 다르다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했다.
곡성에는 <시향가>란 양조장이 있다. 예전엔 곡성역 근처에 있었으나, 얼마 전 자리를 옮겼다. 한 번은 역을 지날 일이 있어 연락을 했더니, 그날은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침 바람이 매서워 소형차가 주행 중에도 들썩이던 날, 양조장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려다 휴대폰을 붙잡은 양손마저 흔들려 사진을 건지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닿았는지, 이번 여행에는 새로 문 연—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 했으나—양조장에 초대를 받았다. 아니 여행 일정처럼 물 흐르듯 들어왔다.
양조장 방문하면 먼저 묻는다. “촬영해도 돼?” 가능한 범위를 확인하고, 장비를 살핀다. 같은 양조자로서 어떤 기계를 쓰는지, 내가 필요로 하던 장비가 여기에 있는지, 내 숙제의 해답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 발효조의 온도와 장비의 스케일, 저장고의 규칙적인 숨소리에서 이곳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읽어낸다. 얼추 둘러보다가 술냉장고 앞에서 멈춘다. 라벨이 완연한 완제품보다, 라벨이 덜 붙은 병, 아직 이름 없는 실험주, 돈으로 살 수 없어 신주단지처럼 모셔둔 술이 더 궁금하다. 우리 양조장에 오는 방문객들에게 나 또한 실험주를 꺼내어 반응을 묻는다. 내 혀가 놓친 조각을 타인의 말에서 주워 담고, 내가 미처 텍스트로 묶지 못했던 감각을 그들의 표현에서 배운다. 술은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술은 혀 사이를 지나 사람 사이로 가서야, 비로소 한 잔이 된다.
그날, 우리 셋이 시향가의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엮는 동안, 바깥에서 낯선 이들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명절이라 고향에 내려왔다가 술을 사려 왔다고 했다. 만약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안쪽에서 대표와 지인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광경이 몹시 부러웠을 것이다.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유리창 너머의 불빛 아래서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은 난로 같았다.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인다. 지인이 아니어도, 마치 알코올에 자성이 있는 듯 사람들의 발걸음이 잔의 원심으로 끌려든다. 술은 사람을 부른다—그냥 부르는 게 아니라, ‘함께’라는 단어의 초대장을 꺼내 든다.
잔을 비우는 일은 어쩌면 마음의 문을 천천히 여는 일이다. 숙희도, 지섭이도, 나도, 마음 속에 쌓아 두었던 이야기의 씨앗들이 따뜻한 조류를 타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술은 혀를 느슨하게 만들지만, 마음의 매듭을 푸는 것은 결국 불빛 아래의 대화다. 알코올은 핑계이고, 진짜로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건 사람이다. 누군가의 웃음, 짧은 공감의 끄덕임이 잔 속 파문처럼 원을 그리며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