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반도식당><태안성당>
서해 바다와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는 태안 시내. 이곳은 격렬한 도시의 숨소리보다는 조용히 쉼을 건네는 작은 마을의 중심이다. 태안읍은 충청남도 서해안의 품속에 안긴 듯, 완만한 지형과 리아스식 해안선 위로 자연과 도시가 서로의 경계를 흐릿이 녹이며 공존한다.
분주한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다. 태안읍 터미널에서 군청로를 따라 이어지는 도심의 구간은, 하루의 삶을 살아내는 주민들과 순간을 여행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엇갈리며 고요한 활기를 만들어낸다.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 삶의 질감이 느껴지는 태안의 본모습이다.
도심을 천천히 걷다 보면, 문득 외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땅'. 큼지막하게, 붉은 글씨로 써 내려간 이 한 글자는 간판도 아니고 광고도 아니다. 부동산 유리창 너머에 덩그러니 놓인 이 글자는, 낯선 이에게 낯설게 다가오면서도 왠지 마음 한편을 건드린다.
'땅'은 말한다.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의 무대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유하고 싶은 본능이라는 것을. 그 단어는 욕망이고, 희망이며, 현실의 무게다. 바다와 숲, 들판과 해수욕장을 지나 도심에 들어선 이에게, 너무도 현실적인 이 한 글자는 여행자의 발길을 문득 멈춰 세운다.
한때 태안은 농부와 어부의 땅이었다. 이곳의 흙과 바람에는 호미질과 그물질의 기억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 태안은 도시의 피로를 벗고 두 번째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매혹적인 안식처가 되었다. 해가 지는 바다를 품은 이 고장은 누군가에겐 은퇴 후 마지막 정착지로 그려지는 이상향이며, ‘땅’은 그 꿈의 밑그림이자 상상의 씨앗이다.
서부시장 한켠, 바닷바람이 드나드는 자리에 ‘우럭덕장’이 있다. 수많은 배들이 귀환한 후, 신선한 우럭을 손질해 천일염으로 간을 하고, 다시 바람에 말리는 이 공간은 시간과 손끝의 정성을 머금는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우럭은 태안의 향토음식 ‘우럭젓국’의 중심이 된다. 그 짭조름하고 깊은 맛에는 태안 바다의 숨결과 삶의 온기가 배어 있다.
이른 점심을 위해 찾아간 태안 <반도식당>은 1983년, 작은 중화식당으로 시작해 지역의 미각을 책임지는 중식 명가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리모델링된 모습이지만, 식당 안 사진 속에는 여전히 목조 간판과 오래된 정취가 살아 숨쉰다. 식당 이름 속 ‘반도’는 육지와 바다를 잇는 태안의 지리적 의미이자, 지역과 음식을 잇고자 했던 마음이 담긴 상징처럼 느껴진다.
대표 메뉴는 ‘육짬뽕’과 ‘볶음밥’. 육짬뽕은 해산물 대신 사골 육수와 겉절이 김치, 통마늘이 어우러져 태안만의 짙은 풍미를 품고 있고, 볶음밥은 불맛이 입혀진 꼬들꼬들한 식감으로 ‘인생 볶음밥’이라 불릴 만큼 완성도가 높다. 첫 숟갈, 불향이 스치고, 담백하게 퍼지는 밥알의 리듬은 태안의 정직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그날, 내게도 이곳은 ‘인생 볶음밥’의 기억으로 남았다.
식당에서 나와 골목을 걷다 보면 이국적인 외관의 <태안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1964년에 세워진 이 성당은 사람들의 마음과 신앙을 잇는 조용한 쉼터다. 2004년, 본당 설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지어진 성당은 전주 전동성당의 양식을 본떠, 로마네스크와 비잔틴의 절충미를 품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도들이 직접 옛 흙가마에서 구워 올린 벽돌 하나하나에는 손의 온기와 마음의 진심이 서려 있다.
그 고풍스러운 외관 안에는 높은 천장이 아닌, 오히려 절제된 우아함이 흐르고, 신앙의 초심과 현대적 감성이 조화롭게 스며든다. 미사 시간이 아닐 때는 누구든 자유롭게 이곳을 거닐 수 있다. 정적 속에서 울리는 신앙의 속삭임은 여행자의 마음에도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태안은 그렇게, 눈부시게 소란스럽지도 않고, 공허하게 조용하지도 않은 곳이다. 자연과 사람, 과거와 현재, 현실과 꿈이 나란히 걷고 있는 마을. 걷는 내내 어느 단어 하나가 마음에 스며든다. 바다도, 볶음밥도, 성당도 결국 이곳에 있었다. ‘땅’ 위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