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춘천인형극제>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어느 순간, 어린 날의 즐거움을 스스로 졸업해버린다. 소꿉놀이, 딱지치기, 만화책, 비디오게임. 그것들은 어느덧 ‘유치한 것’으로 분류되고, 책장 깊숙이 혹은 기억 저편에 묻히기 일쑤다. 하지만 장르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콘텐츠가 우리를 붙든다면, 그 형태는 나이와 무관한 예술로 다시 살아난다. 인형극도 그 중 하나다. 아이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인형극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깊은 감정의 울림과 상상의 숲을 열어주었다.
한여름, 하늘에서 불쏘시개가 쏟아지는 듯한 햇살을 뚫고 인형극을 보기 위해 춘천으로 향했다. 유럽여행 중 체코의 어느 광장에서 마주한 마리오네트 공연이 그 시작이었다. 민중에게 풍자와 웃음을 안겨주는 줄 인형들의 몸짓은, 말 한마디 없이도 삶을 노래했고 저항을 춤췄다. 그때부터였다. 인형극은 단순한 아이들의 놀잇감이 아니라, 상상력의 열쇠이자 은유의 언어로 다가왔다.
공연장 앞에서 거리 공연이 시작되었다. <Cia Tu Mateixa>. 카탈루냐어로 ‘너 자신’이란 말이다. 브라질 상파울루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 팀은 줄 인형극의 전 과정을 스스로 창작해낸다. 그 손끝의 움직임에는 인간의 온기와 예술가의 진심이 묻어 있었다. 줄에 매달린 인형이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착각에 빠졌다. 줄을 통해 이어진 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가의 맥박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리 공연이 끝나자마자, 예매해둔 실내 공연 <The Big Bang>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스라엘에서 온 팀의 작품으로, ‘성장 인형극’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을 달고 있었다. 막이 오르자 무대는 순식간에 환상의 도시로 변모했다. 버려진 전자 폐기물들이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기 시작했고, 하나둘씩 생명처럼 꿈틀거렸다. 그 장면은 마치 기술 문명의 무덤에서 피어난 기계 생명의 부활 같았다.
인형극과 라이브 영상 기술이 융합된 이 작품은, 단지 줄거리 전달을 넘어서 하나의 철학적 판타지를 선사했다. 어른을 위한 동화이자, 동화를 입은 성찰이었다. ‘쓰레기’는 상징이 되었고, 관객에게 묻는다. ‘무엇이 버려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기술과 자연, 인간과 생명의 본질이 관객의 마음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공연이 끝나도,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배우들은 인형을 들고 무대에서 아이들에게 시연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였고, 나 또한 그 무리에 섞여 아이처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품는 일이라는 걸.
줄 위에서 춤추던 인형들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나도 모르게 놓쳐버렸던 감정들, 잊고 지낸 상상력, 그리고 다시 손에 쥐고 싶은 삶의 온기. 인형극은 그런 것들을 나에게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