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으로의 첫 여행
제대 후 첫 학기, 예비역이 되어 복학한 나의 1순위 목표는 학점을 올리는 일이었다. 군대 가기 전 미뤄둔 성적 수확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기에, 금요일까지 빽빽하게 수업을 넣었다. 그러나 불과 2주 만에, 한산한 교정 속에서 ‘괜히 들었나’ 하는 후회가 스멀거렸다. 그러던 어느 점심시간, 친구와 마주친 한 장의 현수막이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금강산 육로관광 지원자 모집’. 대학생 할인까지 있다니, 무료하던 학과 생활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여행은 아직도 내 생애 가장 인상 깊은 여정으로 남아 있다. 금강산의 능선과 교예단 공연의 현란함은 꿈결 같았고, 다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북한 땅이기에 22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유리잔 속의 물결처럼 선명하다. 그 후로 ‘금강산’이란 단어는 나에게 파블로프의 종소리처럼 설렘을 불러왔다.
이번 여행의 출발과 종착지는 ‘속초’였다. 그러나 친구의 권유로, 우리는 지도 위에서만 동경하던 땅, 속초 북쪽의 고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차례 계획만 하고 미뤄왔던 그곳이었다. 속초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표지판 위 단어 하나가 나를 멈추게 했다. ‘여기부터 금강산입니다.’
순간 놀랐다. 금강산은 온전히 북한의 품에 있는 줄만 알았으니 말이다. 물론 행정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금강산은 남한 강원도 고성군과 군사분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다.
고성은 북한과 마주 선 땅이다. 지도 위의 경계선은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지만, 막상 이곳에 서면 묘한 정적과 평화가 감돈다. 바다와 산이 동시에 숨 쉬고, 설악의 능선이 해안선을 따라 조용히 고개를 내민다. ‘위험하다’는 인식과 달리, 이곳은 가장 솔직한 자연의 얼굴을 간직한 곳이었다.
해안길을 따라가면 작은 어촌 마을들이 나타난다. 주민들은 낯선 이에게도 미소를 건네고, 바닷바람에는 소금기와 갓 지은 밥 냄새가 섞인다.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마음은 스스로 고요를 배운다. 가끔 마주치는 세련된 카페는 마치 청량제처럼 여행길에 스며든다.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바다의 숨소리가 마음 깊숙이 파고든다.
마침내 우리의 목표로 삼은 북쪽 끝, 능파대에 닿았다. 나와 동행한 친구가 BTS팬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앨범 촬영지인 ‘능파대’를 온 건 아니었다. 와보니 그러했다. 능파대는 파도를 굽어본다는 이름 그대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절벽 아래로 부서지며 흰 포말을 일으켰다. 그 소리는 마치 바다가 오래 준비한 심포니 같았다.
날씨는 맑았고, 수평선 너머까지 시야가 트였다. 바닷바람은 묵은 마음을 씻어내리고, 햇빛은 파도 위에서 금빛으로 부서졌다. 그 순간, 고성은 경계와 자유, 기억과 현재가 한자리에 머무는 숨은 보물이 되었다.